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중국 혁명가 열전 2]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彭德懷)


 
제9호 [중국 혁명가 열전 2]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彭德懷)

펑더화이는 한국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활약하여 위기에 빠진 북한을 구해내었다. 1.4 후퇴 당시 중국군을 주력으로 하는 조중 연합군은 한국군과 UN군을 평택 선까지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중국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매복, 우회, 분할 등 그들만의 장기를 발휘하여 전세를 일거에 뒤엎었다.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북한과 중국에서는 승전으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로 승승장구하였다.

펑더화이는 삼국지 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와 조자룡을 합쳐 놓은 듯한 인물이다. 용맹하고 성질 급한 것은 장비를 빼닮았고 충직하고 담대함은 조자룡을 뛰어넘는다. 그는 마오쩌둥과 동향으로 후난성 샹탄현 출신이다. 필자는 중국 여행 때 마오쩌둥의 생가와 펑더화이의 생가를 보러 갔는데 펑의 집이 훨씬 후미진 산골이었다. 그곳에 가서 펑더화이의 두 아우도 혁명 과정에서 희생되었음을 처음 알았다. 펑더화이는 빈농의 자식으로 소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소년가장이 되었다. 머슴, 소년광부, 동정호 제방 수리 인부 등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 국민당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사병에서 시작하여 국방부장에 입각했으니 오로지 그의 실력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 기댄 것이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자 공산당은 장시성에서 난창(南昌)봉기를 일으키며 혁명군대를 창건하였다. 펑더화이는 1928년 후난성 핑장(平江)에서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펑더화이의 부대는 역시 징강산에 가서 마오쩌둥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국민당군의 토벌로 징강산에서 후퇴한 홍군은 그 후 난창의 봉기군과 합류하여 장시성 루이진(瑞金)에 소비에트 수도를 건설하였다. 국민당군의 토벌로 루이진을 빼앗기고 대장정에 나서자 펑더화이는 두 개의 홍군 주력부대 중 1개를 맡아 지휘하게 된다. 그때부터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군사노선을 견결하게 지지하며 무력으로 뒷받침하였다. 주력부대 하나를 맡았던 린비아오(林彪)가 군대의 지휘권을 펑더화이에게 넘기자고 주장하자 단호히 반대했으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스스로 당중앙을 선포했던 4방면군 지도자 장궈타오에 맞서 지도부를 견결히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북의 옌안부근까지 추격해온 국민당군을 일거에 섬멸시켜 공산당이 서북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마오쩌둥은 말위에서 큰 칼을 비껴든 이가 누구인가? 바로 나의 펑대장군일세.”하는 시를 지어보내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시기 펑더화이는 백단대전을 일으켜 지휘하였다. 백단대전은 팔로군이 일본군에 맞서 백 개 연대를 동원한 작전으로 공산당의 상징적인 항일전투가 되었다. 이로써 공산당은 항일전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얻게 되었으며 힘을 얻어 일본군의 근거지 후방에 대규모 해방구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해방구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국공내전 때 펑더화이는 지도부가 자리잡은 섬서성 연안의 수비 책임을 맡았다. 국민당군 30만 대군에 맞서 펑더화이는 휘하병력 3만 명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지연전과 소모전을 펼치며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섬서성은 물론 칭하이, 간쑤, 닝샤 등 광대한 서북은 물론 신장 위구르 자치구까지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지도부 대부분이 참전에 반대하였다. 국공내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때였고 5년간의 내전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미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할 수는 없다. 내전 승리까지 몇 년 더 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며 마오쩌둥의 참전을 뒷받침하였다.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펑더화이는 감연히 당안의 관료주의와 철강생산 방침을 비판하였다. 1959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당의 실책과 오류를 비판하였다. 그러잖아도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던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편지에 격노하였고 펑과 동조하는 이들을 반당 반혁명으로 비판하여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후 펑더화이, 황커청, 시중쉰(시진핑 서기의 아버지) 등이 잇따라 실각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펑더화이는 서북의 광산 개발 등 한직에 있다가 홍위병들에게 끌려왔다. 조리돌림과 구타 등 온갖 수모를 겪던 펑더화이는 4인방의 표적이 되어 장기간 연금상태에 처해졌다. 그들은 펑더화이가 암에 걸려 사망하자 다른 이름으로 화장하여 골분을 섬서성에 안치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펑더화이는 바로 복권되었으며 뼛가루를 후난성 샹탄의 고향마을 뒷산에 안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펑더화이의 생가는 물론 묘소까지 성역화되어 커다란 동상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펑더화이는 권력의 정점에서도 비판과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나는 주석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따질 일이 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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