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대한민국의 교사들, 총궐기하다’



제9호 [노동]

대한민국의 교사들, 총궐기하다

 

지난 718일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이 전해졌다. 억울한 죽음이라는 확신과 슬픔이 교사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마침내 교사들의 광장이 만들어졌다. 3만 명, 6만 명을 헤아리더니 드디어 20만 명이 넘었다. 80년 서울의봄, 876월 민주항쟁, 2017년 촛불항쟁에 견줄만한 봉기로 한국현대사에 기록될 만하다.

무엇 때문인가? 한마디로 교사들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해 온 불합리한 제도와 법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불합리한 제도와 법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 독재에 있다. 찬찬히 살펴보자.

첫째, 멀리 10년쯤 전 아동학대처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의 교사들이 학생들 또는 학부모들의 예기치 않은 민원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교육청과 경찰서에 교사의 징계 또는 처벌을 요청하는 일이 잦아졌다. 잘잘못이 가려지기도 전에 교육청과 경찰서에 불려다니는 불명예는 기본이고, 심지어 무혐의로 판정이 나도 직위해제나 징계는 별개로 다투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형편이다 보니, 교사들은 학교에서 돌연 을이 되었다. 학생들이 다툼을 벌여도, 학습 진행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여도 아동학대로 고발될까 두려워진 교사들이 학생들과의 대화와 만남 자체를 주저하게 되었다. 교사의 학생 지도가 정서적 아동학대로 고발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관료들의 무책임과 책임전가는 교사들의 고통을 더 크게 하였다. 이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궁지에 몰린 교사들을 돕기는커녕, 교사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억울한 누명이 벗겨져도 민원인의 압력에 굴복한 관료들은 민원 내용에 담긴 소소한 잘못을 이유로 다시 징계를 기도하여, 교사들로 하여금 헤어나올 수 없는 체념과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다.

넷째, 교육부의 부당한 간섭과 통제가 교사들의 고통을 가중했다. 상급 관청이자 권력자로 군림하는 교육부의 간섭과 지시는 거부할 수 없는 공문으로 수도 없이 쏟아진다. 교육적으로도 전혀 유익하지 않은 교사 개개인의 수업 방식, 평가 방법, 학생 생활지도 등에 대한 교육부의 시시콜콜한 간섭은 학교와 교사들의 자율성을 해치는 비민주적 행태이며, 교육을 망치는 일일 뿐이다.

교사들의 정당한 교육권을 억눌러온 대표적인 요소들이다. 억눌린 것은 교권이 아니고 교육권이다. 학생들에 대한 교사들의 통제권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종류의 교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교사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러한 교권이 아니라, 수업과 생활지도에 대한 책임과 권한 즉, 교육권이다. 학교장에게만 모든 권한이 주어져 있고, 학생, 학부모는 물론 교사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번 교사들의 봉기는 법과 제도의 모순을 깨닫게 된 교사들의 정당한 교육권 회복 선언이다. 현재 교사들의 고통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당한 민원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교육모순을 담고 있다.

학교는 그대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 안의 극도의 경쟁과 차별 그리고 갈등 역시 자본 독재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극도의 경쟁과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 약자들끼리의 각자도생, 약육강식, 승자독식 이데올로기가 횡행하고, 불안과 불만, 그리고 긴장과 공포, 혐오와 배척이 극대화되고 있다. 사회 전체의 재부가 확대되었으나, 그 재부는 자본에 의해 독식될 뿐이다. 재부를 생산한 노동자들은 지배와 속박,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이름하여 자본 독재이다.

자본 독재는 차별과 경쟁을 불가피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설계하였다. 모든 학생들에게는 서열이 매겨지고 그에 따른 차별이 주어진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경쟁과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것은 대학서열화와 이에 따른 극심한 대학입시 전쟁이다. 대학입시 전쟁은 유치원 영어 학습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차별이 주어진다. 이러한 차별과 경쟁은 사립초등학교와 국제중학교, 특목고와 자사고 등을 거치며 계승, 확대된다. 1등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 이러한 학교에 학생인권은 없다. 그러니, 교사들의 고통이 학생인권 강화 때문이란 진단은 허황된 것이다.

아동학대처벌법의 결함 등 교사들의 정당한 교육활동에 부당하게 제동을 거는 장치들을 제거하는 것은 교사들의 정당한 요구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극단적 경쟁과 차별 속에 억압되어 온 교사, 학생, 학부모들의 권리를 함께 회복해야 한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봉기는 잠재해 있을 뿐이다.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손을 맞잡고 함께 봉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대학서열화와 대학입시경쟁을 없애라고. 자본 독재의 학교 지배를 멈추라고.


이을재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노동자교양예술] 선택적 친화력 – 1809년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 vs 2024년 진보당의 선택적 친화력

한아석 2024 년 총선에서 진보당 ( 그리고 민주노총의 전국회의 정파 ) 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위성정당에 들어갔다 .  진보당이 보수 양당들과는 선거 협력을 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국회의원 배지를 향해 이전투구처럼 하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