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응답하라 1987 울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응답하라 1987 울산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3년 6월 18일 일요일

내 가슴에 묻은 현차 비정규 류기혁 열사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5년 초가을 9월 5일 현대차노조 이상욱 집행부는 다음과 같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징계해고의 사유는 무단결근이며, 이 과정에서 업체의 부당성이나 왕따 등의 내용은 없었음.”, “해고 후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등의 2-3주 잠깐 실무를 봄(복직투쟁은 없음).”, “성격이 집요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따른 방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위 입장문은 9월 4일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옥상에서 목매어 자결한 류기혁 동지에 대한 현대차 정규직 집행부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류기혁의 죽음은 노동운동과는 무관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않고 다른 방향으로 보는’사람의 신병비관 자살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좌파 집행부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뿐이다. 사측이나 경찰의 입장문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망발이다.

류기혁 동지는 2004년 2월 월차도 못쓰게 하는 회사의 횡포에 맞서 노조에 가입하였고 노조에 대한 애정을 갖고 꾸준히 노조 활동에 참가해왔다.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사무실은 양정동 울산노동자신문 사무실이었다. 나 또한 그 사무실에서 근무하였기에 류기혁 동지와 여러차례 이야기도 하고 술도마신 기억이 있다.

영덕 출신의 청년이었고 고향의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책임감 있는 동지였다.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던 류기혁 열사가 자본의 핵심공간인 울산 현대자동차공장에서 노동조합을알게되고 노동조합을 공동체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조합활동을 했지만 자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가입만으로 탄압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는 심리적 압박을 겪어야 했다.


노조탈퇴 압력에 시달리고 병가신청등 정당한 권리가 무시되자 극도의 불안감을 보이다가 무단결근이라는 사유로 해고되었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다.

류기혁동지의 죽음이 현대차노조에 의해 신병비관 자살로 규정되고 열사 인정도 거부됐다. 

결국 류기혁 열사는 노동운동 내의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다.

9월 6일 울산시청에서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민주노총 울산본부, 울산인권연대 등 25개 울산시민사회단체는기자회견을 통해 “명백한 사회적 타살인 이러한 죽음 앞에 우리는 더이상 무감각 할 수 없으며 더이상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선언했다. 

이들 단체들은 △현대차는 고 류기혁 열사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며 △불법파견 노동자를 정규직화하고 비정규직 노조원들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고 △정부 역시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이상 양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류기혁 동지가 생을 달리한지 18년이 지났지만 윤석열 정권의 무단적 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는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살아 남은자의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전원배

2023년 1월 2일 월요일

짜고치는 집회를 깨부숴

응답하라 1987년 울산. 

우왕좌왕하던 수백 명의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켜

1991년 4월 26일 시위 중 피신하던 강경대 학생을 백골단이 쇠파이프로 구타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어 5월 6일 안양교도소에서 박창수 동지가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치사 당했다. 

이 두 사건으로 노태우 폭압에 저항하는 노동자, 학생, 민중들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불붙었다. 울산에서도 노동자와 시민들이 “노동운동 탄압 규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업과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울산의 노조대표자와 민족민주운동 대표자들이 투쟁본부를 결성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는데,집회를 앞두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투쟁지도부가 “태화강 고수부지까지만 행진한 후 거기서 평화집회를 한 후 투쟁대오를 돌려 자진해산을 한다.”고 경찰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에 치를 떨었고 어떻게 하든 투쟁열기가 넘치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무력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아내야만 했다. 형식적인 집회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에 반발한 우리 노동자들은 집회 전날 학생운동 출신들의 도움으로 화염병 200여 개를 만들었다. 

집회 당일 울산 고속터미널 앞에서 수만 명의 집회대오가 전경들에 의해 차단됐지만, 집회 지도부는 평화시위를 유도하면서 겉으로만 대치했다.

이때 “강경대 학생과 박창수 동지를 살려내라!”며 10여명의우리 대오 노동자들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경찰 역시 약속 위반이라고 생각했는지,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집회지도부나 경찰 모두 상황통제권을 상실했다. 우리 대오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 앞에서 투쟁을 선도하다가 고속터미널을 우회하여 울산시청으로 돌격했다. 

당시 경찰은평화적 시위라는 집회 지도부의 사전약속을 믿고 울산에 집결시켰던 병력을 부산과 대구의 집회로 분산시켰다. 

갑자기 성난 파도처럼 노동자들이 울산시청 앞으로 밀려들자, 허를 찔린 수백 명의 전경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대오에 의해 체포돼 무장해제 당했다. 너머지 수적으로 밀린 수백 명의 전경들은 울산시청 안으로 도망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됐다.                   전원배

2022년 12월 26일 월요일

현차 들고양이 파업과 도로연수

응답하라 1987 울산  
어용노조와 사측 폭력에 맞선 양봉수 열사 

양봉수 동지는 91년 말 사측의 ‘노조 없애기’에 맞서다가 해고된 후 93년에 복직했다. 복직 당시 93년 윤성근 현대차위원장이 김영삼 정부의 긴급조정에 따른 강제합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조합원들이 실망하고 같은 해 8월 선거에서 민주노조 진영이 분열돼 어용 으로 평가 받던 이영복 초대 위원장이 재선됐다. 이영복은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으 며 노사협조를 강조했다. 

그런데 95년 회사 측은 노사 합의를 파기하고 작업강도를 높이기 위해 생산 라인에 신차 ‘마르사’를 투입했다. 이영복 위원장 측이 사측에 굴복한 가운데 양봉수 동지는 해당 라인의 대의원 권한을 동원하여 라인을 중단시켰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해고당한 양봉수 동지는 ‘부당해고 무효 확인’ 심판을 청구했다. 노동법과 단체협약에 따르면 해고 효력을 다툴 동안에는 조합원 자격이 유지되는데, 회사 측은 양봉수 대의원을 20여 명의 경비를 동원하여 정문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95년 5월 12일 양봉수 동지는 노조탄압 대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동료 해고자 4명과 함께 회사 앞에 갔으나 출입을 저지당하였다. 이에 양봉수 동지는 온몸에 신 나를 붓고 “내 몸에 손대지 말 라”고 외치며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경비들은 이를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저지하였다. 


 "나는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동지의 몸에 불이 붙게 되었다. 나는 그날 운전면허 연수 비정규직 강사를 하던 중에 비보를 듣고 회사 앞으로 달려갔다. 병상에 누운 양봉수 동지는 “나는 죽으려고 하지 않았다 현장 조합원을 사랑한다 다시 돌아가 함께 하겠습니다”며 투쟁의지를 꺾지 않았다. 

투쟁에 소극적인 이영복 집행부 대신 민주노조 진영은 대책위를 만들어 현대차 노조 설립 이후 최초로 조합원 대중의 자발적인 들고양이 파업(법외 파 업)에 들어갔다. 전직 위원장들이 파업지도부를 맡으면서 사측의 사과와 이영복 어용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면서 경찰과 대치했다. 

사측은 경찰력 투입을 요청했고 결국 파업대오는 체포되거나 흩어져 싸웠다. 경찰이 울산을 포위하고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했지만,우리 조직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경남을 돌아다니면서 수배자들을 피신시키고 투쟁 소식을 알렸다. 

내가 경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도로연수 차량 ‘프라이드’에 수배자들을 싣고 울산에서 경주로, 청도로 뛰어다니던 혈기 왕성한 시절, 그 많던 투사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전원배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

김현종의 육필원고에 얽힌 추억

1990년 4월 26일 늦은 밤 울산 동구 자취방에 쉬고 있는데 김현종(가명, 현대중공업 노동자) 동지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웬만해서는 직접 전화하지 않는 동지라서 전화를 받아보니 예의 침착한 음성으로 지금 볼 수 없냐는 것이었다. 

바로 현대중공업 정문 앞 2층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보자마자 그는 오토바이 키를 나에게 넘겨주며 무덤덤하게 “한 동안 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오늘 밤 현대중공업 골리앗 점거 농성 조로 차출(?)되어서 점거농성 가는데 이번에는 구속될 거라 했다. 비장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 문방구로 가서 노트 한 권, 볼펜 한 자루를 사서 그에게 전달하면서 농성 중 일기형식으로 글을 남기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피식 웃으며 “지금 소풍 가는 줄 아느냐, 겉보기에 평온해 보이지만 분위기 살벌하다.”라면서 “그 일기를 어떻게 가지고 내려오냐.”고 했다. 




 나는 “세상일 모른다.”면서 “ 반드시 틈이 날 거라.” 하면서 “만일 바로 체포될 상황이면 골리앗 상공에서 기록을 불 질러라”했다. 정부와 자본은 헬기까지 동원하며 진압에 나섰지만 51명 의 노동자는 13일 동안 82미터 높이의 골리앗에서 투쟁했다. 

이에 호응하여 울산 곳곳에서 730명이 연행될 정도로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졌고, 전노협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단행했다. 다행히 글솜씨 좋은 그가 생생하게 기록한 그 일기는 점거농성 막바지에 언론사 기자들이 올라갈 때 믿을 만한 기자를 통해서 무사히 지상에 내려왔다. 

그 일기가 바로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이다. 요즘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잔잔한 파문 을 일으키고 있나 보다. 

 김현종의 육필원고는 당시 ‘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외곽 출판사인 노동문학사 편집위원인 정지아 작가와 내가 최종 편집을 함께했다. 머리를 맞대고 원고를 다듬던 30년 전이 문득 어제 같이 느껴진다.   <전원배>

[문화] 99%인 ‘우리’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 (20 호에서 이어짐 ) 99% 인  ‘ 우리 ’ 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 문화적으로 답해보자고 했다 .  해서 좀 철지나긴 했지만 옛 드라마 얘기 좀 해보련다 . 2009 년도에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