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6일 금요일

[중국 혁명가 열전1] 중국혁명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제7호, [중국 혁명가 열전1]

중국혁명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의 현대사에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마오쩌둥의 강점을 알아보고 지도력을 양보한 뒤 끝까지 보좌했던 사람, 그는 중국혁명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으며 신중국의 초대 총리로 활약한 저우언라이이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장쑤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그는 텐진의 난카이대학에서 재학하며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5.4운동을 이끌었다. 1920년에는 근공검학 유학생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갔다. 다음 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지부 서기를 맡았다. 그는 중국 국민당 유럽지부 주비위원의 성원이었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과 국민혁명군 1군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광둥지역 위원장과 군사부장을 맡았다. 1927년에는 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어 지도부로 활약하였다. 그해 81일 허룽(賀龍), 예팅(葉廷), 쭈더(朱德), 류보청(劉伯承)등과 함께 중국 최초의 군사폭동인 난창기의를 일으켜 전적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군사 부문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1928년에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군사위 서기를 맡았으며 1931년 장시성의 소비에트로 가서 중앙국 서기, 공농 홍군 총정치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마오쩌둥이 경험주의, 부농주의, 우경기회주의자로 몰려 배제당하고 명목상의 소비에트 주석을 맡고 있을 때였다.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보구와 리더를 탄핵할 때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지도부의 일원으로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리더와 보구를 군사지휘부에서 함께 끌어내린 것이다. 그는 마오쩌둥의 주장을 뒷받침했으며 지휘부에는 자신과 마오, 그리고 장원텐(張聞天)이 포진했다. 서안사변 때 그는 막후에서 장쉐량, 국민당 쪽과 교섭을 맡았으며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후 충칭에 파견되어 국민당과 합작에 따르는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하였다.

저우언라이는 합작기간 중 국민당 쪽 좌파인사들, 군부의 군인 및 영향력이 있는 인물, 교육, 문화, 정계의 인사들과 두루 교분을 쌓았다. 심지어 미국의 중국 파견군 사령관 웨드마이어나 미국 특사 마셜 등과 교분을 쌓으며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저우언라이의 이같은 노력은 1945년의 국공간 평화협정, 내전발발 무렵의 휴전협정을 끌어내는데 효과를 발휘했다. 저우언라이는 리커농, 캉성등 공산당의 정보담당자들을 지휘하며 국민당 내 많은 인사들의 전향 및 귀순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차이팅카이, 정짠 등 옛 군벌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아 그들의 영향력을 공산당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하였다. 신젠, 숑샹후이, 궈루구이등 수많은 첩자들을 국민당의 정치와 군사 쪽에 심어 중요한 정보를 얻고 정치공작을 하게 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저우언라이는 총리 및 외교부장을 맡았다. 외교부장은 후임자에게 인계했지만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서 소리나지 않게 일을 챙기고 성사시키는 유능한 총리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천이, 허룽 등 무고하게 박해를 받는 노혁명가들을 음으로 양으로 보호했으며 덩샤오핑을 보호하며 훗날을 대비했다.

저우언라이는 근검절약하여 속옷을 기워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부인 덩잉차오와 죽으면 화장해서 조국의 산하에 뿌리자.”고 약속한 뒤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훗날 덩샤오핑도 사망하자 화장 후 중국의 강과 바다에 유해를 뿌렸다. 중국의 장례문화를 화장으로 바꾸기 위해 지도자들이 앞장서 실천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한마디로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었다. 외유내강한 성품에 내외의 태도가 일치하고 실천력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 나는 그를 중국 현대사에서 최고의 혁명가로 보고 있다.

 이철의


 

자본주의화된 중국변혁의 싹은 광범한 노동자층

 

중국 사회성격 혹은 사회구성체를 둘러싼 논란이 많다분명한 것은 중국은 사회주의인가자본주의인가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사회인가중국 특색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인가?

오늘날 중국은 79년 이전의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이행의 장기적인 과도기로 설명한다그러나 중국은 이미 세계 초국적 자본과 얽히고설켜 협력하고 경쟁하는 구조다생산수단의 집단적소유는 사적소유로생산의 목적은 전 인민의 풍요롭고 평등한 삶이 아니라이윤이 지배하는 생산이 지배적이 되었다.

1978년 이후 농촌의 집단적·협동조합적 소유형태인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농가 생산책임제로 전환했다자영농(소농)의 양산이고 이들은 시장경쟁을 통해 몰락한다농민들은 토지에서 분리되어 임금노동자로 전화해왔다중소형 국유기업은 1997년 이후 점차 주식합작제로 사유화했고대형 국유기업의 점진적 사유화도 진행되었다국유기업 수는 총 17,502개로 민간기업 18만 개에 크게 못 미친다그러나 국유기업과 민간기업의 산업총생산은 각각 22조 위안과 25조 위안(KDI)이다산업 총생산은 민간기업이 많다시진핑 정권은 2013년 혼합소유제경제의 추진이라는 구호를 채택하여 사적 자본으로 전화를 독려해왔다국유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점점 경쟁에 시달리면서 많은 노동자가 해고되었다자본가계급에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지 오래다. “붉은 자본가를 포함한 거대 독점자본가계급이 사회 전체와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그 발전은 광범한 새로운 임금 노동자층을 만들어 냈다이들의 존재는 중국 공산당 내 새로운 사상 투쟁과 중국이 사회주의로 새로이 전환하는 힘이 될 것이다.

 편집국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노동자교양예술] 선택적 친화력 – 1809년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 vs 2024년 진보당의 선택적 친화력

한아석 2024 년 총선에서 진보당 ( 그리고 민주노총의 전국회의 정파 ) 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위성정당에 들어갔다 .  진보당이 보수 양당들과는 선거 협력을 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국회의원 배지를 향해 이전투구처럼 하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