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3일 화요일

[노동자교양예술]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졌던 맑스주의 혁명가 이육사의 혁명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한아석

이육사(1904~1944)는 서정시를 쓰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그는 맑스주의자였다육사는 1932년 아나키즘에서 맑스주의로 전화해 가던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에서 7개월간 수학하고졸업식에서 공연한 연극 <지하실>의 대본을 썼는데이 연극은 다음과 같이 공공연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그린다.

경성의 모 공장 지하실의 어두운 방에서 노동자 일동이 일을 하고 있는데 라디오 방송으로 모월 모일 우리 조선혁명이 성공하다라는 보도가 있고계속하여 용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지금 평양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지금 부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하는 방송을 해 오고마침내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는 국유로 되어서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식당일터주거 등이 노동자 등에게 각각 지정되어 완전한 노동자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으므로 농민노동자는 크게 기뻐하여, ‘조선혁명성공만세를 고창하고 폐막하였다-김공신 신문조서(2), 국사편찬위원회한국민족독립운동사자료 31, 1997, pp. 149150.-

1934년 4월 대중』 지에는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란 글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소개하였다. 1936년에는 노신추도문을 써서 노신의 리얼리즘 문학이 사회주의 혁명을 고취시켰다고 알려주었다그리고 자신도 1936년 12월에 풍림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를 발표한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십이성좌 그 숱한 별을 어찌나 노래하겠니

 

꼭 한 개의 별아침 날 때 보고 저녁 들 때도 보는 별

우리들과 아-주 친하고 그중 빛나는 별을 노래하자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 볼 동방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 안에 핏대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 보자

 

처녀의 눈동자를 느끼며 돌아가는 군수야업(軍需夜業)의 젊은 동무들

푸른 샘을 그리는 고달픈 사막의 행상대(行商隊)도 마음을 축여라

화전(火田)에 돌을 줍는 백성(百姓)들도 옥야천리(沃野千里)를 차지하자

 

다 같이 제멋에 알맞는 풍양(豊穰)한 지구의 주재자(主宰者)

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질 노래를 부르자

 

한 개의 별 한 개의 지구(地球단단히 다져진 그 땅 위에

모든 생산(生産)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보자

앵속(罌粟)처럼 찬란한 열매를 거두는 찬연(餐宴)

예의에 끄림없는 반취(半醉)의 노래라도 불러 보자

 

염리厭離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신()이란 항상 거룩합시니

새 별을 찾아가는 이민들의 그 틈엔 안 끼여 갈 테니

새로운 지구엔 단죄(없는 노래를 진주(眞珠)처럼 흩이자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좌(十二星座모든 별을 노래하자

[이육사(2004), 이육사 전집, pp. 63-63, 깊은 샘]

 

*군수야업(軍需夜業). 군수공장의 야간작업한국인들은 군수공장에 징용되어 야간에도 작업을 했다. *행상대(行商隊).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행상. *옥야천리(沃野千里). 옥토가 끝없이 넓은 들판. *풍양(豊穰). 곡식이 잘 익어 풍성한 모양. *앵속罌粟양귀비를 뜻한다원문에 嬰粟으로 되어 있는데 이 앵속의 오식으로 모두 보고 있다. *찬연(餐宴눈부시게 밝다영광스럽고 훌륭하다. *염리厭離육사가 한문을 쓰지 않았기에불교에서 사바세계의 더러움을 싫어하며 떠나는 것으로 추정.

사회주의 혁명가 이육사는 3연의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 땅인 식민지 조국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하기 원한다이 새로운 지구는 2연에서 노래한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 볼 동방의 큰 별이다새로운 지구를 건설할 이들은 4연의 군수야업의 젊은 동무들”, “행상대”, “화전에 돌을 줍는 백성”, 노동대중으로이들이 5연의 지구의 주재자로/임자 없는 한 개의 별을 가지고 옥야천리를 차지한다이들은 6연의 모든 생산의 씨를 우리의 손으로 휘뿌려” 본다이 혁명 과정에서 7연의 과거의 사상을 대변하는 ()”은 새로운 별로 가는 노동대중 이민에 낄 이유가 없다혁명은 8연의 한 개의 별에서 시작하지만 한 개 또 한 개의 십이성과 모든 별로 가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육사가 맑스주의자라는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육사가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육사의 시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신좌파적 해석들이 돌기도 한다그러나 분명하게 육사는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1934년 7월 안동경찰서의 육사에 관한 기록에도 배일사상민족자결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으로 나와 있다.(국사편찬위원회한국민족독립운동사자료 30, 1997, p. 178.) 육사는 사회주의 조직활동을 이어가다가 43년 7월 체포된 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024년에 이육사의 1936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를 읽는 것은 학창 시절 독립운동가로만 알던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의 혁명시를 소개해 보았다.

 


[추모] 노동운동가 故 김승만 동지를 기리며 - ―노동해방의 꿈과 희망을 다시 세운다!

  

박찬웅

사람이 한평생 일관된 삶을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세상이 변하면 그 변화에 맞추어 신의 생각도 맞추어 갈 수밖에 없다하지만한 사람의 신념과 사상은 변화의 가운데서도 동일성을 가지게끔 해준다그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며 힘든 운동가로 사는 삶을 유지하게 만든 것은 민중이었다사회의 절대다수이자 생산의 주역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하지만 역사의 매듭에서는 떨쳐 일어나는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은 고 김승만 동지의 삶에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렵고 힘들었던 삶의 여정과 똑 닮은 듯한 산행을 좋아했다수많은 친구와 산행하며정상에 오르는 과정은 운동에서 실천해야 할 단결과 연대의 과정이었다정상에서 만끽했던 성취감은 기필코 쟁취할 새 세상을 향한 각오를 다지는 의식이었다.

고 김승만 동지는 1971년에 태어나 2024년 54세로 짧게 인생을 마감했다청년기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그는 청년기의 열정에 나이가 더해지며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족할 수 있을 때도 자신을 스스로 담금질했다오산에 있는 이주노동자센터를 찾아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했으며구조조정의 광풍 속에서 고립된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투쟁을 지원했다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노동전선)에서 곤궁한 상근 환경에서도 주요 직책을 맡아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했다전국의 투쟁 사업장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비정규직 철폐 운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언제나 변함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던 그에게 있어서 절박한 투쟁들에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산행의 보람이 정상에서 이루어지듯이 그가 가고자 한 길은 민중과 함께 싸워 쟁취할 노동해방의 세상이었다.

그는 노동당 당원이었으며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이었고사회적파업연대기금의 집행위원이기도 했다프닉스정치경제연구소와도 관계를 맺었고사회주의 정치신문 발간을 계획하는 소모임에도 참여했다지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자신을 삶을 태워 하나의 불꽃이 되고자 했다그가 던진 불꽃은 '단결하라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혁명의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새롭게 전진하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그의 폭넓은 활동만큼이나 먼저 간 동지에 대한 애석함을 가진 많은 동지가 있었다이렇게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동지들의 뜻에 따라 노동전선은 일주일간의 추모 기간을 지정하고 임시 분향소를 차렸으며추모위원회를 구성해서 7월 5일 추도식, 6일에는 고별식을 가졌다. 7월 7(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대성리 근처 산에서 개최된 고별식은 "해방의 그날 (노래공장 1992)" 추모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참석자 전원이 손을 잡았다노동해방 세상을 향한 헌신과 노력을 기리며 그 뜻을 받아 안는 모습에 먼 곳에서 고 김승만 동지도 기뻐했을 것이다.

 


       [해방의 그날]

잡은 두 손이 썩어져 사라져도 노동해방의 그날을 생각한다.

우리는 기나긴 밤 다 지나고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피맺혀 흐르는 저 강물은 맑게 흐르리

숨져간 영혼 강물 되어 굽이쳐 흐르리

기나긴 밤 다 지나고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앞서간 열사의 함성소리 들려오리니

부활의 노래여 해방의 불꽃이여

 

[노동운동가 고 김승만동지 약력]

1971년 7월 9일 영암출생

- 1991~1997년 학생운동

- 1998~2004년 한국노동네트워크운동협의회 간사아시아노동넷

- 2005~2014년 오산이주노동자센터 간사오산다솜공동체

- 2003~5년 에바다농아원 투쟁

- 2000년대 초반~ ‘노동자힘’ 조직 활동

- 2009년 쌍용차 77 파업 투쟁 결합

- 2012년 노동해방’ 조직 활동

- 2014~2017 노동전선 조직국장집행위원장 역임

- 2020년 사회적파업연대기금 집행위원

- 2024년 6월 24일 동탄 자택 근처에서 산책 중 운명

생전 노동전선노동당전국결집프닉스노동사회과학연구소사회적파업연대기금 등 다수 단체에서 활동



[중국혁명가] 문화대혁명으로 스러진 마오쩌둥 후계자노동운동 출신의 혁명가 류샤오치(劉少奇)

[중국혁명가]


이철의

류샤오치는 1898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인데 마오쩌둥보다는 다섯 살이 적다그는 적지 않은 기간 마오쩌둥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했다그러나 끝내 마오에 의해 국가주석직에서 해임당하여 실권한 뒤 문화대혁명 때 병사했다. 1981년에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훗날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그를 기려 이렇게 말했다. “류샤오치 동지는 중국혁명과 건설에 전심전력노심초사하였다경제정치군사문화교육외교와 당의 건설들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다그는 전당과 전군은 물론 전국 인민들의 깊은 흠모를 받고 있다.”

류샤오치가 태어난 닝샹현(寧鄕縣탄즈충(炭子冲)은 마오쩌둥의 고향 샹탄현 샤오산(소산), 펑더화이의 고향 샹탄현 우스 마을과 각각 30킬로 거리에 있다인근에서 공산당 주석과 후계자그리고 최고 군사지도자가 태어난 것이다류샤오치는 1919년 중학을 졸업하고 1920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1921년에는 소련의 모스크바 동방 공산주의노동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해 창립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 귀국한 그는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에서 근무했다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장시성의 안위안(安源)의 탄광으로 가서 리리싼과 함께 광부들의 파업투쟁을 이끌었다그는 안위안 광부클럽의 주임을 맡았으며 1925년에 전국 총공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그 후 상하이광저우우한에서 반제투쟁을 벌이고 홍콩·광저우 대파업 투쟁과 우한과 한커우의 영국 조계 반환투쟁에 참가했다.

1927년 중공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공합작이 결렬된 뒤 허베이상하이동북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였다. 193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련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어 현지에서 근무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 6차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어 귀국했다그는 전국 총공회의 당서기를 맡았고 당내의 폐쇄주의와 모험주의 노선에 제동을 걸었다류샤오치는 국민당 통치지역에서는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장기간 은신하며 역량을 비축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이 시기 리리싼과 취추바이 등을 대표로 하는 당내 지도부의 모험주의와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1932년에는 장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며 푸젠성 당서기를 맡았다. 1934년부터 장정에 참가했는데 1935년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다. 1936년에 화북에서 중공 북방국 서기를 맡았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화북에서 군중을 고무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며 항일근거지 확장에 종사했다. 1938년에는 중공 중원국 서기를 맡아 화중 지역의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투쟁을 벌였으니험지에서 종횡무진한 것이다. 1941년 국민당이 환남사변을 일으키며 공산당 신사군을 공격주력을 궤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류샤오치는 화중으로 가서 신사군 정치위원겸 화중국 서기를 맡아 천이(陳毅등과 함께 무너진 군을 재건하였다. 1943년 옌안으로 간 그는 중공 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마오쩌둥이 충칭에서 장제스와 국공담판을 벌일 때류샤오치는 옌안에서 중공 주석대리를 맡았다. 1947년 국민당군이 옌안을 점령하자 중공은 지도부를 나눴다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런비스는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지도하고 류샤오치와 주더는 화북에서 전국의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 그는 정부 부주석을 맡았으며 1954년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1956년에는 중공중앙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1959년에 류샤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방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천만명이 아사하는 가운데 마오쩌둥은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이때부터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제에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류사오치는 조급한 집단화와 경제계획에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갈등관계에 있는 소련과의 관계복원을 원했다마오쩌둥덩샤오핑천윈 등 지도부는 인민공사를 합작사로 되돌리고자영농지를 허용하며작은 개인기업을 허용하는 등으로 경제회복을 꾀하였다이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당이 대중을 멀리할 뿐 아니라 지식분자의 우파경향”, 농민의 자본주의로 가는 자발적 경향과 소련의 수정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을 방조하거나 방치한다고 생각하였다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그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리지 않아 사실상 밀어낸것으로 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해임한 뒤 암암리에 반격을 꾀하였다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뒤 류샤오치가 중소동맹 복원을 건의하자 마오쩌둥은 그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한 것처럼 자신을 밀어낼 것으로 생각하였다.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상황이 좀 더 분명해졌다. 1968년 류샤오치는 당내 주자파반혁명분자가 되어 타도대상으로 전락했다그는 모든 직무에서 축출되었으며 후계자 자리는 린비아오에게 돌아갔다그는 당에서 제명된 뒤 가택연금이 되어 홍위병들의 습격과 폭행을 당했다이후 송나라의 고도 카이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당뇨병폐렴이 악화되어 1969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980년 공산당의 류샤오치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복권되었다.


 

 

[국제] 미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의 파산 - 러시아와 인도 정상회담 ― 러시아와 인도 정상회담, 경제ㆍ정치ㆍ군사적 협력 강화

 

편집국

세계는 경제적 이익을 둘러싸고 각축전인 벌어지고 있다이는 정치적ㆍ군사적으로 이합집산하는 소용돌이 상황이다미국 워싱턴에서 나토 정상회의를 축으로 각국 정상이 몰려갈 때인도의 모디 총리는 러시아 푸틴을 만나러 갔다. 2024년 총선에서 3(2024~2029정부 구성 인도의 모디 총리가 2024년 7월 8~9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그 결과로 "러시아-인도견고하고 확장적인 파트너십"에 대한 양국정상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3연임을 성공한 인도 모디는이전에 중국 견제 차원에서 미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을 지지했다그러나 경제적ㆍ정치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러시아와 경제적ㆍ정치-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인도는 중국ㆍ러시아ㆍ브라질 등과 함께 브릭스의 주요 회원국이기도 하다인도와 러시아 간의 경제적ㆍ정치적ㆍ군사적 협력 강화는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ㆍ태평양 전략에 크게 균열을 내고 있다.

인도의 행보의 핵심적인 동기는 바로 경제다인도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 인프라 구축을 위해, 2008년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그 이유는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인도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에미국은 원자력 관련 기술 이전을 하지 않고 사실상 훼방을 놓았다이런 환경에서 인도의 에너지 자원 확보는 제한되었다.

에너지 자원 확보가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대두된 가운데러ㆍ우 전쟁 발발 이후인도는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원유를 싼값에 공급받아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에 맞는 안정적인 공급은 인도 경제에 있어서 관건적일 수밖에 없다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러시아 극동 사할린 지역의 천연가스와 원유에 대한 장기 계약이 논의 되었고원자력발전소 개발에 관한 의견을 교환 하였다(Haidr, 2024)

인도의 외교정책이 미국 중심에서 브릭스를 비롯한 러시아와 협력하게 되었을까인도 모디 정부는 3연임에 성공했다. 1(2014~19정부는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편승하는 친미 외교노선을 따랐다그러나 2(2019~24정부는 인도를 일본호주와 하나의 군사동맹 체제로 묶어 세우려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경제적 이익을 좇아 러시아와 정치-경제-군사협력을 발전시겼다철저히 경제성장을 위한 실리 중심 외교정책을 펼친 결과다러시아 역시 시베리아 대륙철도와 새로운 북극항로를 개발하여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확대를 논의하고 있다.

러시아와 인도의 협력 강화 움직임은 러시아의 북극항로 개발과 인도의 동방정책이 조우하는 모양새다그동안 국제질서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그런데 러시아가 주도하는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에 인도가 적극 참가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었다러시아가 추진하는 동방포럼은 미국 정치 체제를 비판하며 다자적인 새로운 국제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기본 동력은 시베리아와 사할린 지역의 천연자원과 에너지 자원이다인도의 에너지 수급은 경제 성장에 크게 득이 되기 때문이다.

인도와 러시아 사이의 경제협력 강화는 두 국가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이번 정상회담에서 군사협정이 조인되지는 않았으나 점차 군사적 협력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인도는 러시아제 T-90 전차를 면허 생산하고 최신 전투기를 수입하며 핵 잠수함을 장기 임대하여 운용하고 있다이와 같은 두 국가의 국방 협력은 무기 부품 조달에 국한되지 않고 첨단 무기 체계의 기술 이전과 협력으로 발전하면서 양 국가의 국방 협력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즉 미국이 원했던 인도와 미국 사이의 군사협력은 사실상 멀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이주노동자] 지옥도 아리셀을 또 가슴에 새깁니다

  

김헌주(경북북부 이주노동자센터)

아리셀 참사보도를 접하는 날이 바로 김승만 동지의 부고를 들은 날이었습니다십몇 년을 아픈 몸을 부여안고 투쟁의 현장으로 가고 싶어 몸부림을 쳤던그러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동지가 차라리 부럽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이 지옥도를 보지 않아도 되는 동지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평생을이주노동자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동지가 먼저 도착한 세상에는 또 하나의 계급이주노동자가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F-4 비자를 아십니까?

아리셀 참사는 행정관할의 난잡함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와도 여러모로 관련돼 있다굳이 리튬전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사업장 안전관리에서 소방과 안전의 영역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그 속에서 책임의 분산과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행정의 관할권 역시 고용노동부와 법무부로 이원화돼 있다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 노동자가 농사를 짓는지물고기를 잡는지에 따라심지어 작은 배를 타는지 큰 배를 타는지에 따라서도 담당 기관이 달라지고 다른 법이 적용된다겉으로는 복잡한 행정체계의 문제지만 이것이 이 나라가 가진 이주민에 대한 차별의 근간이다. ([매일노동뉴스] ‘참사진상규명에 이르는 길’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대표)

자본은 참 대단합니다이주노동자를 E-9으로 H-2, F-4, C-4, E-8, E-10으로 선을 그어놓고 가두고 갈라치기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이 선을 넘어오는 자들을 미등록으로 내몰고 강제 추방합니다이 지긋지긋한 노예제 고용허가제로 한국을 찾은 이주노동자들의 비자는 E-9입니다사업장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고 업종 간 이동도 금지되어 있어 이주노동자들에게 족쇄를 채워서 부려 먹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하는 대한민국에 일제 강점기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혹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던 많은 동포가 찾아왔습니다발전된 조국에서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그래서 동포를 우대한답시고 특례 고용허가제를 만들었습니다사업장도 약간은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업종 제약도 없어서 그나마 약간의 권리가 보장됩니다많은 이주노동자단체가 특례 고용허가제도를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차별을 조장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입니다그래도 이 알량한 특례 고용허가제도가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로 가는그래서 모든 이주노동자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오롯이 누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특례 고용허가제로 한국을 찾는 동포 신분의 이주노동자들 비자는 H-2 비자입니다그런데 H-2 비자 이주노동자들이 안정적 체류를 확보하기 위해 또 비자를 바꿉니다. H-2 비자는 특례 고용허가제 비자이기 때문에 체류 기간이 4년 10개월로 제한되어 있습니다그래서 F-4 비자로 비자를 바꿉니다영주권에 준하는 안정적 체류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자를 획득하는 방법의 하나가 자격증을 따는 것입니다듣도 보도 못한 자격증이 많습니다그래서 또 출입국 사무소 주변 행정사 사무실은 F-4 비자 알선이란 선전 문구를 내걸고 중계 수수료 등으로 돈을 법니다우여곡절 끝에 H-2 비자로 한국을 찾은 동포 이주노동자들이 또 온갖 노력을 기울여 F-4 비자를 취득합니다그러나 무슨 무슨 자격증으로는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그런 자격증은 현장에서 쓰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있다고 하더라도 굳이 외국인(이주노동자가 아니라 외국인동포가 아니라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습니다다시 단순노무업종으로 내몰리는 동포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F-4 비자 소지자는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단순노무직 종에는 일할 수 없습니다그러다가 또 단순노무 중에서 호텔과 식당 등은 인력난에 시달리니 허용한다는 조치를 발표합니다눈 가리고 아웅이지요 아무튼 우수인력 유치라는 자본의 갈라치기를 동포 우대정책이라는 허울이 좋은 포장으로 덧씌워 또 벽을 만들었습니다우수인력 유치라는 허울이 좋은 차별 정책이 비자 진입장벽을 만들고 자격증을 취득한 우수인력인 F-4 비자 소지자는 우수인력이기 때문에 단순노무를 해서는 안 됩니다그 우수인력들이 단순노무를 하다가 아리셀 참사현장에서 쓰러졌습니다이게 아리셀 참사현장이 말해주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비자 중에서도 가장 부러워하는 F-4 비자를 소지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분통합니다억울합니다.

그러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이 기막히고 억울한 죽음 앞에 오열하는 유족들을 향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자본은 합리적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들이댑니다참사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인데 그 비극 앞에서 오열하는 유족들 앞에서 자본은 또 천연덕스럽게 합리적 후속 처리를 들이댑니다그런데 이 자본가들이 들이대는 합리적 후속 처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참사 희생자 중에 많은 이들이 F-4 비자 이주노동자들이었습니다단순노무 업종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일할 수 없는 업종에서 일한 이주노동자들은 규정을 어긴 사람들이고 강제퇴거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자본은 이윤을 위해 이주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그 악랄한 만행을 숨기기 위해 단순노무 업종종사를 합리적 후속 처리의 근거로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배상금을 줄이기 위한 악랄한 계산법입니다.


이가 갈립니다
그러나 이만 갈고 있을 수 없습니다이 잔인한 자본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터 보겠다고 F-4 비자를 선택하고 또 다른 벼랑 끝에 몰린 이주노동자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이 치떨리는 현실 앞에오로지 이윤만을 생각하면서 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주판알을 튕기는 저 자본가들에게 우리는 또 무엇을 어떻게 돌려주어야 합니까?

 

위험의 이주화죽음의 이주화

3D업종이 보통명사가 되고 나니 자본은 뿌리산업이라는 또 희한한 명사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뿌리산업이라고 포장하는 ‘3D업종은 ‘4D 업종으로 이미 변했습니다더럽고 Dirty, 힘들고 Difficult, 위험한 Dangerous 뿌리산업은 이제 죽음의 Death 업종이 되어서 ‘ 4D 업종이 되었습니다아리셀참사 이후 많은 전문가가 위험의 이주화를 말합니다아닙니다위험의 이주화가 아니라 죽음의 이주화입니다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과 현장에서 부딪치는 많은 활동가가 수년 전부터 죽음의 이주화를 부르짖어 왔습니다. ‘죽음의 이주화를 막지 못한 이 책임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이윤에 눈이 먼 자본의 뿌리산업이 죽음의 이주화로 흘러가는 이 흐름을 막지 못한 이 책임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아니 피가 맺히는데 거기서 또 죽으라니요헐한 목숨값 몇 푼 쥐여주고 자본의 철옹성을 쌓는 현장으로 내모는 이 현실을 우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가 말했습니다또 하나의 계급을 어쩔 거냐고.

수많은 언론에서 중국을 언급합니다그러다가 또 양념처럼 라오스를베트남을 언급합니다아닙니다아닙니다아리셀 참사현장에는 또 하나의 계급으로 살다가 비극을 당한 노동자들이 있었을 뿐입니다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쌓인 담장이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는 사이에도 우리는 처절한 투쟁을 통해 이 담을 허물어 왔습니다그러나 자본은 너무나 강고하여 우리의 처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진 담장보다 새로 쌓아 올린 담장이 더 많은 잔인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9년의 투쟁 끝에 작은 승리를 쟁취한 아사히 동지들이 그렇고, GM 비정규직 동지들이 그렇고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동지들의 눈물이 나는 복직 투쟁이 그러합니다.

여기에 담장을 허물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있습니다아니 그 담 너머에서 또 다른 계급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그러다가 혹은 불법으로 내몰리고외국인으로 내몰리고 그래서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그러나 불법이 아닙니다미등록입니다외국인이 아닙니다이주노동자입니다노동자입니다.

감히 말합니다또 하나의 담장을 먼저 허물어야 합니다그래서 또 하나의 계급을 없애야 합니다어쩌면 이 담장을 허무는 일이 우리가 모두 싸워왔던 비정규직 철폐의 전선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확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어쩌면 싸우다 싸우다 지쳐 쓰러지는 무모한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또 하나의 계급 이주노동자를 없애고다시 비정규직을 없애고 그래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저 노동해방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이 처절한 아리셀 참사현장에서 이를 악물고 다짐합니다투쟁!


[문화] 99%인 ‘우리’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 (20 호에서 이어짐 ) 99% 인  ‘ 우리 ’ 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 문화적으로 답해보자고 했다 .  해서 좀 철지나긴 했지만 옛 드라마 얘기 좀 해보련다 . 2009 년도에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