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혁명과 배신의 시대] 박헌영을 대리하는 조공중앙 그룹의 사상가 박치우



제9호 [혁명과 배신의 시대] 

박헌영을 대리하는 조공중앙 그룹의 사상가 박치우

1959년 신동엽은 진달래 산천에서 산사람들을 노래하여 탄압받았다.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쳐 산으로 갔고, 산으로 갔기에 산사람이 되었을 뿐, 그 싸움은 그들에게 영예도 과오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모순을 파악하고 그 모순을 깨는 실천에 온몸을 내던졌을 뿐. 여기 산사람들의 선생님이 있다. 이 나라 노동자들은 박치우(朴致祐)라는 이름 석 자를 알아야 한다. 1949124일 서울신문과 동아일보는 신태영 육참총장의 기자회견을 보도했다. "19491120일 무렵 태백산지구 전투에서 적 괴수 박치우를 사살했다.“

박치우(1909~1949) 향년 40. 함경북도 경성출생, () 박창영은 성진중앙교회 목사·함북노회장, 시베리아 선교. 1933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조수(助手) 임용. 1936󰡔조광󰡕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로 등단, 이후 신남철·김오성 등과 함께 신경향 평론가. 1938년 숭실전문 교수,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이원조(이육사 동생)와 교유. 1945810일 중국 북경에서 해방을 맞음. 장춘(신경)에서 두 달간 활동하고 서울로 돌아옴. 194512월 김태준·이원조와 함께 조선문학동맹 평론부 위원. 1946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국수주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특별보고, 󰡔현대일보󰡕 창간, 발행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선전부위원. 221일 김태준·신남철·임화·김순남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 및 문화대책연구회 위원, 이해에 저서 󰡔사상과 현실󰡕(백양당) 발간. 󰡔현대일보󰡕 발행인 및 주필. ‘대성출판사실질사장으로 사장실에서 여운형과 수시로 바둑 회동(고 성대경 증언). 1945~1946년 북에서 열린 6차례의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담에 4차례 박헌영을 수행하여 배석. 19471월 미군정 탄압을 피해 북행(北行)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에서 활동. 194710월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박순철). 19499월 조선인민유격대 제1군단 정치위원으로 남행(南行). 194911월 경북 영덕에서 칠보산 가는 길목 백암산 보이는 곳에서 전사.

박치우는 모국어, 일어는 물론, 영어·로어·독어 등 어학에 정통한 1세대 서양철학자였다. 그가 쓴 돌아가는 맹자라는 글은 한학에도 깊었음을 알려 준다. 손꼽히는 문학평론가로 경성제대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바이올린도 켰다. 부인 김정숙은 숙명여고 농구선수. 박치우는 함경도 사투리가 억셌다. 조선공산당 2대 재정부장 성유경과 강동정치학원 강사 김원주의 외아들 성일기(차진철)가 강동정치학원으로 찾아가자 이렇게 말했다.

, 너 어마이 니 오는거 며칠째 눙이 빠지라고 기다렸당이. 내가 날래 기별했응이 시방 꼬부데게 오는 중일끼다. 쬐끔만 기다려 봐라.” 남에서 온 청년들은 모두 빨치산으로 ()복무하라는 김일성쪽 결정이 중앙당 이름으로 내려와, 성일기는 회령 제3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때 박치우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붙였다가 떼면서 성일기에게 이르기를, “봅세, 사람은 말이오. 동그라미를 꼭 끼면 답답해서 못 쓴당이. 이렇게 좀 늦춰서 살아야 한당이라 했다.

그러나 열일곱 소년에게 이렇게 늦춰서 살라고 당부했던 억센 함경도 사투리 박치우 선생 자신은 1945810일 북경에서 라디오로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 무렵은 이육사(이원록·)가 북경으로 망명해 있던 시기이다. 북경 일본헌병대는 이육사와 이병희(경성콤그룹)를 쫓고 있었다. 이육사는 어머니상으로 안동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가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주소지 경북경찰서의 관할을 넘어, 북경 일본군헌병대가 조사해야 했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이육사는 고문받다 순국했다. 박치우는 해방을 맞아 장춘의 거점을 거쳐 2달 뒤 국내로 들어와 19467월 이원조(이원록 동생)가 만든 잡지 大潮에서 건국동원과 지식계급을 주제로 좌담회를 하였다. 이 시기 박치우는 조선공산당 중앙그룹의 사상가로,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으로 2년간 일했다. 그리고 194911월에 전사했다. 이태의 남부군에 나오는 경성제대 출신 철학교수가 박치우다. 박치우는 주검도 다른 지도자들처럼 목 잘린 사진으로 미군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신태영이 발표를 미룬 2주간 동안 미군 정보부는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 박치우에 대해 온갖 조사를 끝내고 한국군에게 발표를 허락했을 것이다.

앞으로 박치우가 북경에서 이육사와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야 하고, 박치우 전집도 내야 한다. 김일성대 만든 러시아동포 박 일은 박치우의 맑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깊이는 놀라울 정도였다. 한문실력도 뛰어나 개인적으로 한문을 배운 적도 있다. 사석이긴 하지만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기개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고 말했다.

2020년 한홍구는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라는 박치우의 글을 보고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한겨레에 썼다. 한 씨는 남한에 박헌영 미제간첩설을 널리 퍼뜨린 김남식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다. 묘한 인연이다. 지금도 한 씨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거나 박치우가 반미결핍증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남한 노동자·민중들은 이런 저주술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비, 1996) 197쪽에는 박치우가 朴昇龍(朴治宇 1907 함북 경성)으로 나온다. 박승룡과 동일인인 朴治宇朴致祐는 한자 이름과 경력이 다르다. 해방 전 박승룡과 해방 후 朴致祐朴治宇 한 사람으로 틀리게 설명하기에 바로 잡는다.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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