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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정치] 내란 국면 속의 노동자정치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탄핵은 조만간 가결되고 내란범 윤석열 일당은 무력화되리라 예상된다. 국회 가결만 아니라 헌재 인용까지, 또 내란범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질 때까지, 단결된 노동자민중의 압박은 불가피하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민중의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기간은 노동자정치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한다. 노동자정치는 내란공범 국힘당 해산 투쟁 및 예상되는 차기 민주당 정권과의 차별화에 머물 수 없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곧 노동자국가 건설 투쟁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구체적 형태로는 통일된 노동자당을 통해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의 대안세력으로 자리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힘당의 해산 내지 최소화로 민주당 권력은 당분간 비대해질 수 있다. 민주당은 미래의 적대세력인 노동자정치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할 것이다. 특히 매수를 통한 분열책을 총가동하고, 노동자정치세력을 민주당 외곽지원세력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노동자정치는 의회의 의석수를 몇개 늘이거나 정부기관에 들러리로 참가시키는 매수논리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다당제나 내각제를 위한 중대선거구제 따위를 거대양당제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자본독재의 극복이 아니라 영구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정치세력은 노동자민중의 민주적 정치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본독재 극복의 구체적 전망을 세우고, 단결투쟁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변혁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노동자정치는 그동안 분산된 부문운동들을 통해 구현되어온 진보적 가치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후재앙, 성차별,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 등을 극복하는 일은 이윤추구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독재 하에서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자본축적이 아니라 공존과 공영을 추구하는 노동자정치만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노동자정치는 각 부문별 진보운동들이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이들 운동과의 사안별 연대를 넘어선 유기적 결합을 추진해야 한다. 노동자정치는 자본독재가 착취를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한다. 평등은 노동자정치의 기본이념이다. 노동자정치가 구현하려는 사회는 한마디로 평등사회다.

평등의 원칙은 당건설과 당운영, 노동자국가 건설과정, 노동자국가 운영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노동자정치가 추구하는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통한 자본권력과 그 대리인들의 독재가 아니라, 이 자본독재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심부름꾼들이 사회의 주인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절대적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당과 국가의 일꾼들을 감독⋅비판하고 필요시 소환하며 그들의 특권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장치, 또 주요 의사결정에 구성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장치들을 최대한 개발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노동자국가는 소수 지배자들의 지배도구라는 악역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 출발점은 민주적인 당운영이다.

비록 일차 내란에서 실패했지만 윤석열 일당은 끊임없이 전쟁을 유발하고자 했다. 사소한 국지전조차 이차 내란을 정당화할 것이다. 전쟁을 막는 것은 노동자정치의 주요 당면과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일차적으로 전작권을 가진 미국의 개입에 좌우된다. 노동자정치는 한국이 겪고 있는 식민지 상황 극복을 위해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한다. 전쟁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제국주의는 생산력 차원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관세⋅환율⋅통화전쟁 혹은 자의적 제재나 정권교체 공작 따위만 아니라 노골적인 군사개입도 자행해 왔고, 앞으로도 이를 반복할 것이다. 노동자정치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서 전세계 노동자국가, 노동자정치세력, 평화반전운동세력과의 국제연대를 적극 추진한다.

아직 정국은 가변적이지만, 탄핵과 내란범 처벌 여론이 기선을 잡았다. 노동자민중의 적극적 투쟁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불붙었다. 노동자민중을 적으로, 짓밟아도 되는 개돼지로 취급해온 저들은 ‘중과부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정치는 대중 속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운동의 분열을 극복하지도 못했다. 내란 국면은 이런 난관을 돌파할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를 지속 가능한 효율적 착취와 불평등 체제를 재정비하는 자본독재의 또다른 분파들에게 고스란히 상납할 수는 없다. 노동자정치세력은 내란세력을 제압하는 과정에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 자본독재가 초래해온 공멸위기 극복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자.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정치] 기후위기의 근본적 해결,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오세중

지난 9월 7일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라는 슬로건 아래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2만 여명의 대규모 집회가 진행되었다. 기후위기비상행동과 환경운동연합 등 611개 단체가 참여하였다.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발생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누가,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이다.

기후 위기 문제가 심각해지고 관련 투쟁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노동운동’이 중심이 아니라 기후위기운동, 여성운동 등이 새로운 변혁운동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운동도 유행이 있는 듯하다. 한때 환경운동이 유행했던 것처럼….

노동운동이 곧 변혁운동은 아니다. ‘노동운동=변혁운동’이라는 생각은 두 가지 편향을 발생시킨다. 먼저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또는 그와 관련된 법제도 개정 투쟁)을 열심히 하면 변혁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반대 편향으로 ‘노동운동’을 구시대적 변혁운동이라고 비판하면서 여성운동이나 기후위기운동 등이 새로운 변혁운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 또는 ‘시민’의 조직화를 주장한다. 파업은 노동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여성들도 가사노동에 대한 총파업을 통해 사회를 멈출 수 있고,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시민들의 파업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성운동, 기후위기운동 등 다양한 투쟁이 성장, 발전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고 함께 연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투쟁이 변혁운동의 한 ‘부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계급은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노동자계급이 변혁운동의 중심’이라는 주장을 왜곡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진정으로 혁명적 계급이다. 왜냐하면 다른 계급들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몰락하고 사라져가며, 그들의 투쟁은 때로는 혁명적이지만, 때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혁명적일 수 있지만, 농민의 확대는 역사를 되돌리는 것이다. 대기업의 독점에 반대하는 시장 상인들의 생존권 투쟁에 함께 연대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시장 경쟁 체제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농민, 자영업자 등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더욱 몰락하며 노동자계급으로 흡수된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계급인 이유는 자본주의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발전 과정 속에서 그들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받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공장 자동화,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서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하지만, 노동자들은 오히려 고용불안과 실업, 빈부 격차의 심화 등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이제는 자본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가 환경오염, 기후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결과물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이윤 확대, 자본의 축적으로 귀결된다. 생산력의 발전이 노동자들의 풍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원인은 노동의 결과물이 노동자의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생산이 아닌, 소수 자본가의 이윤 축적을 위한 생산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국가와 정치, 정부 시스템은 오직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각성하도록 해야 한다. 자본을 가진 자가 주인이며 자본의 이윤만을 위한 생산이 아닌,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고 생산물을 소유하며, 노동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도록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1차적인 관심은 당면한 경제적 문제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의 문제, 기후위기 등의 문제에 대해 알리면서 이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이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각성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가 탄생시킨 노동자계급이 바로 그 체제를 변혁할 주체이며,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고 세상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여성에 대한 착취, 기후위기 문제뿐만 아니라, 장애인 문제, 소수자에 대한 인권 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노동문제, 기후문제, 여성문제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어떻게 조직하고 강화할 것인가?’이다.


 

2024년 9월 1일 일요일

[정치] 양질전환과 헤게모니

  

홍승용 (현대사상연구소)

 

1. 파국의 가시화

미국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에 대한 예고는 자본독재의 첨병들인 주식과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벌써부터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미국발 경제위기의 본질은 미국 중심 다국적 금융자본의 글로벌 수탈체제가 갈수록 버티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 이제 그 종말의 출발점에 와 있다는 것, 자본독재의 종주국에서부터 체제 붕괴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는 것 아닌가. 어떤 미봉책들로도 해소될 수 없는 이 근본문제는 이미 1세기 전 레닌이 명확히 개념화한 바 있다. 즉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능가하는 독점자본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부후하는 최종단계, 즉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누려온 달러패권에는 군사력이나 이데올로기만 아니라 고도의 생산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생산력발전은 불균등하다. 점점 더 많은 생산력 분야에서 미국은 중국, 독일, 대만, 한국 등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달러패권을 위협하는 요인으로서 전쟁의 불씨로 작용한다. 생산력의 불균등발전에 따른 경제영토 재분할은 국제법 따위가 아니라 힘관계에 의해, 결국 제국주의전쟁을 통해 결정된다. 제국주의전쟁은 이미 인류사회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체제가 종식되지 않는 한, 전쟁의 참화가 어디까지 번질지는 예측불허다.

연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지진이나 쓰나미 등은 물론 인간적 요인을 벗어난 자연재해다. 그러나 이로부터 파생되리라 충분히 예상되는 재난, 즉 제2, 제3의 후쿠시마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는 확실히 인재다. 즉 자본증식을 절대원리로 삼아온 자본독재체제의 필연적 산물이다. 온난화에 앞서 핵재난으로 폭발할 환경재앙, 경제위기로 인한 절대빈곤의 전지구적 양산, 일상화된 제국주의전쟁의 참화는 인류문명을 당장이라도 끝장낼 수 있는 재앙의 삼위일체다.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에 맞서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자본독재의 노예이길 거부하는 노동자민중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2. 양질전환

대안사회 건설은 객관적 필요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극복을 위한 방법과 대안의 구체적 전망을 공유하는 조직적 주체세력이 일정 수준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위기는 혁명이 아니라 야만의 밑거름이 되기 쉽다. 최근 영국의 반이민 폭력시위가 그 단적인 예다. 노동자계급의 분열, 외국인 혐오, 성적, 지역적, 세대간 갈등, 운동의 파편화, 각자도생 문화 등등을 유도⋅조장하는 것은 자본독재세력이 교육⋅문화사업⋅소비구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뿌리깊은 반공이데올로기, 특히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확산된 반노동자중심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허물고 대안사회 건설의 주체적 조건을 만드는 과정은 바로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전쟁의 한가운데에 들어서는 것이다. 주체적 조건 형성의 요체는 대안전망의 생산과 대중적 공유다. 대안사상⋅이론⋅정책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검증할 수 있는 전문 지식노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극소수에 머물고, 또 그 성과들을 노동자민중 다수와 공유하지 못한다면, 고전적인 표현으로 ‘이론이 대중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지금처럼 자본독재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노동자민중을 압도한다면, 어떤 위기가 밀려와도 대안사회 건설은 첫발을 떼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노동자민중 모두가 대안사상으로 무장해야 대안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와 혁명적 변화는 예상을 뛰어넘어 교육과정을 압축하고 주체적 조건의 질적 도약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적 도약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어느 정도의 양적 팽창, 즉 적극적 주체들의 조직화와 조직의 일정한 확장을 이루는 것이 필수적이다. 대안의 구체화와 함께, 이를 조직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절대적으로 시급한 당면과제다.

 

3. 헤게모니

대안세력의 양적 팽창은 수정주의나 개량주의의 온상을 만든다고 우려할 수 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조직의 확장에 소극적이거나, 대규모 조직들의 기존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작업을 피한다면, 소수의 폐쇄적 스터디그룹을 넘어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세력확장 자체가 운동의 목표일 수도 없다. 이 난제를 헤쳐나가는 데에는 헤게모니 개념이 유효하다. 대안사상⋅이론⋅정책으로 무장한 적극적 주체들이 아직 소수일지라도, 다수가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면 변질 없는 조직확장도 가능한 것이다.

다수의 자발적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대안사상⋅이론⋅정책이 현실성과 호소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호소력 있는 대안이론 생산을 위한 체계적 연구와 치열한 논쟁 및 검증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필요 있다. 또 검증된 성과들을 광범하게 공유하기 위한 조직적 교육체계를 제도 차원에서도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 이때 민주노총이나 노동자당이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도록 추동하는 것도 고려할 만한 과제다. 무엇보다 대안의 대중화에 적극 나서는 주체들이 헌신적 활동을 통해 대중적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헤게모니 형성의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자본독재와의 가시적 대결만 아니라, 대안세력의 확장과정에서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일부터가 해방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요인이다. 밀려오는 위기를 호기로 전환하기 위한 시간싸움에 전력을 다하자. 재앙은 그냥 기다리는 이들의 몫이다. 전력을 다하는 이들의 몫은 승패를 넘어선 삶의 의미다.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정치] 진보정당의 한계를 넘어....노동자계급이 나아갈 방향과 임무

 

오세중

지난 총선 녹색정의당, 노동당의 참패 속에서 총선 평가와 진보정당의 전망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국회 몇 석 진출을 위해 더불어민주당 비례 정당에 함께 한 진보당, 투쟁의 부재 또는 투쟁을 조직하지 않는 지도부, 비례위성정당 제도의 문제, 진보정당의 통합이 가능한지 또는 필요한지, 반자본-체제전환 운동의 필요성 등등….

이 시점에서 투쟁의 역사를 돌아보자. 87년 폭발한 노동자대투쟁은 ‘민주노조’ 건설과 확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96~97 노동법 개정 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한계를 느낀 노동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결과를 맺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결국 의회의 한계와 정파들의 정치적 이견 속에서 이합집산을 거치다가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의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계급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인가?

현시기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라는 것은 의회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건설) 운동’으로 협소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전환,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단순히 대의기구인 의회만 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는 의회뿐만 아니라 국가기관 전체가 개혁의 대상이다. 사법부는 여전히 기득권과 재벌 앞에서는 공평하지 못하며, 검찰과 경찰은 기득권과 재벌 앞에서 정의롭지 못하다. 언론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수백 명이 폭격으로 죽는 것은 보도하지 않으면서, 미국 대통령 후보 트럼프 피격 사건을 특집으로 내고 있다. 그 이유는 수백 명의 목숨보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좌우되는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조직으로서의 정당은 다양한 계급ㆍ계층의 정치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러한 정당은 근본적으로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계급의 소멸과 함께 소멸되어야 할 존재이다. 지금의 정당정치, 민주주의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기득권 집단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더라도 노동자 민중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당면 과제는 정당정치로 귀결되는 협소한 ‘정치세력화’, 진보정당에 대한 논쟁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 즉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이다. 노동자 민중의 권력 쟁취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계급 투쟁의 역동성과 활동가들의 임무


계급투쟁은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폭발한 노동자투쟁은 조선공산당 재건, 남조선노동당 창당과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건설을 통해 노동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1950년 6.25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노동운동은 수십 년간 침체기에 들어간다. 이후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다시 성장하게 된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며, 그 결과물로 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96-97 노동법 개정 투쟁을 거치면서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97년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확대와 자본과 정권의 탄압 속에서 노동자 투쟁은 지속적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각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일상적 시기에 다수의 대중은 자본가 계급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며,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계급 의식이 발전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87년 노동자대투쟁, 96-97 노동법 개정 투쟁 같은 투쟁의 상승기에 노동자계급 의식의 확대는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투쟁의 침체기에는 확대되었던 의식도 다시 자본주의 의식으로 회귀하거나 다양한 기회주의, 개량주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기회주의, 개량주의 정치조직이나 정당도 발생하게 된다.

노동자 투쟁의 침체기에 ‘주관적 의지’만으로 투쟁조직을 확대하거나 대규모 투쟁을 조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존에 조직된 노동자들이 지속해서 이탈하거나 개량주의, 기회주의 사상으로 오염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의 활동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이탈하거나 개량주의ㆍ기회주의 사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내부 의식화ㆍ조직화 사업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투쟁의 침체기에는 대규모적인 조직화보다 조직의 골간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투쟁의 침체기에 ‘대중적 조직화’ 사업은 오히려 일반 대중에게 퍼져있는 기회주의와 개량주의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한 ‘대중적 조직화’는 오히려 분열과 동요로 귀결되며 결국 무능한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다.

혁명적 정세는 “의도적으로, 자의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개별적인 정당과 전체 계급의 의지 및 지도와 무관한 정황의 필연적인 결과”로 발생한다. 투쟁의 침체기에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은 조직의 이탈을 막고 내부의 의식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가올 전면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국적 골간 확대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4년 6월 16일 일요일

[정치] 단결 없이 승리 없다


 


홍승용(현대사상연구소)

 

1.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단결의 확대다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투쟁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이다. 분열은 투쟁의 실패를 예약해 주며, 역으로 투쟁의 실패는 분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는 투쟁의 일시적 승리나 직접적 전과보다 ‘단결의 확대’야말로 투쟁의 진정한 성과라고 보았고, 궁극적으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했다. 오늘의 제국주의 단계 자본독재하에서도 노동자 국제주의는 해방전쟁의 중심영역에 포함된다.

반면에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고 투쟁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을 단결이 아닌 분열과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것은 자본권력이 언제 어디서나 애용하는 전법이다.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통한 의식과 욕구의 전면적 조작, 그리고 매수와 서열화에 따른 분열의 고착화는 자본독재하의 불변조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지난 30여년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극단적 양극화 속에서도 ‘살만하다’는 대중적 환각이 단결투쟁의 필요성을 뒷전으로 밀어내 왔다.

 

2. 대안사회 건설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오늘의 전지구적 경제위기는 ‘살만하다’는 환각을 극소수만의 특권으로 위축시키고 있다. 매수의 여력도 바닥났다. 자본의 숙명인 생산력의 발전 혹은 불균등발전은 제국주의 전쟁을 일상으로 끌어들여 놓았다. 환경재앙의 상징인 후쿠시마는 자본 헤게모니의 종말양상을 일찍부터 드러내 보였다. 자본독재로는 노동자민중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답이 없으며, 생존을 위해서라도 대안사회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이성적 존재 누구라도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안사회 건설은 자본독재의 연명과 착취의 효율을 위한 개량, 즉 자본독재의 ‘지배비용 감소’에 머물 수 없다. 대안사회 건설은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제압하고 공존과 공영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독자적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자본독재 속에서 의석 몇 개 늘이기 위한 셈법에서 맴돌 수 없다. 독자세력화의 당면 과제는 자본독재와 분명히 선을 긋고,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3. 해방운동 내부의 분열은 치명적이다

그런데 분열은 자본독재의 공작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그에 맞선 해방전쟁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투쟁에 앞장서온 조직이나 정파들 사이에서도, 역사적 경험과 정세판단 혹은 투쟁방법과 추구하는 대안모델 등의 차이로 분열이 고착되어 왔고, 이는 쉽게 극복되지 않고 있다. 그 효과는 실로 치명적이다.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해야 할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등을 돌리는 모습에서, 노동자민중이 어떤 희망 혹은 절망을 찾게 될지 물을 수밖에 없다.

정보공유와 이성적 검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파할 자신이 있다면, 무엇보다 대안사회 건설을 절박한 과제로 여긴다면, 그리하여 단결의 확대를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운동의 통일을 미리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인식체계를 일부 혹은 대폭 수정하는 노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로써 해방전쟁을 위한 대중적 단결의 불씨를 살려낼 수 있다면, 운동의 통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4. 차이를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하자

단결의 길은 평탄대로가 아니다. 곳곳에 함정과 지뢰가 도사리고 있다. 단결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세상물정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조롱당하거나, 심지어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귀착되라는 의구심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독재를 제압할 노동자국가 건설을 통해 평등사회로 나아간다는 목표를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삼는다면, 의회전술이나 제국주의 혹은 통일전선이나 전위당 문제 등과 관련한 인식 차이들은 치열한 논의를 통해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절대화할 수도 없다. 실패의 경험을 딛고 다시 단결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는 역동적 현실을 따라잡는 불굴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공동의 명확한 목표의식이 단결의 길을 밝혀 주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오늘날 노동자민중이 처한 재난의 절박성 또한 단결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저면 자본독재에 맞서 해방전쟁에 나선 전우들에 대한 전폭적 존경을 단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단결 없이 승리 없다는 판단은 해방전쟁의 대전제다.

 


2024년 5월 16일 목요일

[정치] 민주주의에 대하여


오세중

자유민주주의-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

흔히들 ‘민주주의’란 다양한 의견 수렴과 토론을 통해 다수의 결정에 따라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적 의견 수렴과 설득의 과정이 없이 폭력적으로 어떤 사상과 정책을 강요할 때 우리는 그것을 ‘독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절차는 결국 그 사회의 지배계급이 다른 계급․ 계층의 이해를 수렴하는 과정이며, 자신들의 지배를 설득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하였지만, 그 당시에도 하층계급이나 평민은 참여가 배제되고, 지배자들의 서로 다른 정치적 이견을 절충하는 과정이었다. 즉, ‘민주주의’나 ‘독재’라는 것은 결국 지배계급이 지배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며, 그 방식의 차이는 지배계급 내부의 힘 관계, 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힘 관계로 결정된다.

윤석열 정권을 ‘검찰 독재’라고 흔히 표현한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등 노동자 민중은 ‘군부 독재’에 맞서 수많은 투쟁을 하였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자본을 가진 자들의 민주주의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언론인 회칼 테러’를 언급하는 등 그러한 민주주의조차 파괴하려고 하였고, 그러한 저항이 이번 총선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자본가계급의 독재’이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진보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연합’하여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윤석열 퇴진 투쟁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의 한계는 이미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를 통해 그 한계가 드러났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리해고제/변형근로시간제/파견근로제, 노무현 대통령의 기간제법 등 비정규 악법 개정, 문재인 대통령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탄력근로제와 최저임금 개악안 추진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일부에서 아직도 추앙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 등 수많은 노동자의 투쟁과 희생, 농민들의 한미FTA 반대 투쟁 등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소수의 자본을 가진 자들의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끝장내고 이 땅의 다수인 노동자들의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실현해야 한다. 이 땅의 다수인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여성, 성소수자 등 민중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의 전면적인 개편, 자본의 경쟁과 이윤추구가 아닌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경제 시스템과 친환경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의 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민중 민주주의-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 내의 이해 충돌을 조정하기 위한 민주주의일 뿐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노동자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독재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항상 억압과 통제, 군대와 같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땅의 다수인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노동자계급이 소수의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억압과 통제, 물리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아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원칙 속에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고, 소수에 대한 권리 보장이 이루어지며, 충분한 토론과 비판, 설득을 통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민주노총 양경수 집행부의 패권주의적 태도는 자본가계급의 행태와 같다. 진보당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된 정치 방침을 뒤집는 행위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소수’의 집행부가 ‘다수’ 대의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속한 진보당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은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원칙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권력을 가진 소수 집단의 ‘폭력’일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이 다른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구하기 위한 과정, 지배를 위한 형식적 절차일 뿐이라는 인식은 소수 집단의 ‘폭력적 강요’나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이 노동조합 내의 정치적 패권주의와 연결되는 것이다.

노조 집행부의 패권주의적 모습은 종종 나타난다. 진보당 성향의 노조 집행부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조직이 장악한 집행부,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없는 경우에도 자신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합원들이 따르지 않을 때 교묘한 술수나 비민주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 선거에서 부정 투표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편법과 속임수,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그러한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와는 달라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는 편법과 속임수,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고 평등의 원칙 속에서 충분한 토론과 비판을 해야 하며, 전체 노동자들의 단결이라는 관점에서 소수에 대한 배려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사회주의 정치 조직 활동에는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업이 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이 모든 것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은 하나의 사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 때문에 가입한 조직인데,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가입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투표를 통해 특정 종교를 지지하도록 할 수도 있는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조직의 성격과 내용에 맞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99%인 ‘우리’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 (20 호에서 이어짐 ) 99% 인  ‘ 우리 ’ 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 문화적으로 답해보자고 했다 .  해서 좀 철지나긴 했지만 옛 드라마 얘기 좀 해보련다 . 2009 년도에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