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세상의 창] 현 정치적 소용돌이의 근원적 배경과 노동자 계급

 


제9호 [세상의 창

현 정치적 소용돌이의 근원적 배경과 노동자 계급

임기 초반부터 퇴진투쟁에 시달려온 윤석열 정권은 현재까지는 슬기롭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사건들과 그에 분노하는 개별적 집단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자기 갈 길을 꾸준히 가고 있다. 정권의 통치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은 책임자의 사과나 교체였다. 하지만 윤석열정권은 단한번도 사과를 하거나, 책임자에 대한 경질을 하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농민의 요구인 양곡관리법, 의료서비스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간호법은 국회를 통과 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5년간 위임된 권력을 사회적 통합이라는 공동적 이익을 위해서, 그것이 비록 사회내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이자 일시적인 개량책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이 정부는 기존 정부가 해왔던 역할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대통령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한 분파적 권력투쟁의 성격을 가지지만 그 보다는 사회적 압력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87년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사회적 발전 시기는 한도에 다다랐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의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경제생활 전반을 규율하는 생산과 분배, 국가재정의 운영이 지배계급의 이익과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사회적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간 사회 안정의 가늠자로서 중산층의 성장과 국민 복지는 확대되어왔다. 이것은 사회적 생산력의 주요 소유자이자 사용자인 독점자본의 성장과 국내시장의 독점에 의존한 것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독점운동, 정부에 대한 민간적 참여와 통제의 확대, 노동운동의 투쟁과 성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중간층은 아래를 보고 안정감을 느끼며 상층에 대해서는 물신적 숭배를, 하층은 중간층으로의 편입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좌절감으로 팽배한 계층적 질서가 형성되었다. 물론 이것은 물질적 수준에서 전반적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 사회적 안정감을 표현하고 있다. 제도, 법치 민주주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계급혁명이 불가능한 사회적 상태란 이와 같다.

그러나 사회적 욕구가 사회적 발전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계급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증명해준다. 생산력 발전의 한 측면인 우리 사회의 교육 수준의 성장은 대학 진학율은 72.9%에 달하며 대학원생도 매년 30만 명에 달한다. 이러한 교육적 수준에 맞는 일자리를 현사회적 체제하에서는 제공할 수 없다. 고학력자가 대다수인 반면 대기업의 고용, 국가 공기업의 고용은 더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평등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지배계급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결국, 현재의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는 국가재정을 통한 사회복지서비스의 확대되어야 하고 전문가, 기술 인력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확대되어야 한다. 아울러 사회적 강제 규율 조치로 최저임금이 올라야만 한다. 문제는 그 부담의 많은 몫을 자산가들과 중소자본가, 중산층이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에 대한 적대적 분노가 이들 계급 계층이 공유하는 가치동맹이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던 시기, 중산층과 상층 계층의 동맹은 세금문제를 둘러싼 것이다. 자신의 자산가치가 올라가는데 분통을 터뜨릴 이유를 집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석함에서 찾을 수는 없다. 특히 지금의 중산층, 중소자본가의 형성 시기를 감안한다면 앞으로 자산의 대물림을 위해 지불해야 할 상속세, 증여세도 하루빨리 감세되어야 할 계급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다.

윤석열정권은 한계에 처한 지배체제의 재편을 위한 이들 계급계층의 역사적 반동이자 저항을 위한 창과 방패다.

국민국가의 경제적 운영에 있어서 계급계층간 충돌은 일상적이다. 이전 시기, 빈 공간이 채워질 여지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의 투쟁은 양보와 타협, 부분적 승리로 점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한계를 맞이한 지배체제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다. 이 투쟁에서 윤석열정권은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반혁명의 기수로 서 있다. 노동자계급은 윤석열정권을 타도하고 사회 변혁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박찬웅

[詩] 제국주의, 광란의 시대


























제9호 [詩]
 
제국주의, 광란의 시대
 
                                     고희림
 

자본은 넘쳐나고
제국은 터질 만큼 배부른데
인민은 왜 굶주리는가
 
끊임없이
전쟁터를 고르고 골라
인민을 삼키는
제국의 위장은 언제 터지는가
 
제국의 쇼우 윈도우 안에는
살인병기, 인류절멸의 상품
분할과 재분할의 망상이 가득하다
 
동진, 동진!
이윤, 이윤만을 외치며
전쟁이라는 칼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
피바람은 그칠 줄 모른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더욱 빼앗아야 하는
약육강식, 승자독식 동물의 왕국
돈맛을 알아버린
털없는 원숭이들의 탐욕과 광기
 
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비추는 제국의 등대 밑
전쟁범되의 쓰레기가 산을 이룬다
 
제국은 괴뢰를 심고 빠지고
포탄에 유린당한 대지에는 반동의 꽂이 핀다
인민은 지뢰밭에서 신음한다
 
인민의 피로 자라는
제국의 뱃가죽을 벗겨야 한다
제국주의가 폭망할까,
영끌하는 제국의 앞마당에서, 절망의 막바지에서, 쓰레기 범죄더미에서,
혁명은
태동해야 한다
 
전쟁 이제 그만은,
자본주의 이제 그만
제국주의 이제 그만
혁명 이제 시작이다
 
인민은 희망을 비추는 유일한 등대,
자연과 노동과 진실의 진지,
노동과 사랑을 무기로,
 
전쟁에서 내란으로
내란에서 혁명으로
혁명에서 해방으로

[중국 혁명가 열전 2]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彭德懷)


 
제9호 [중국 혁명가 열전 2]

비운의 혁명가 펑더화이(彭德懷)

펑더화이는 한국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활약하여 위기에 빠진 북한을 구해내었다. 1.4 후퇴 당시 중국군을 주력으로 하는 조중 연합군은 한국군과 UN군을 평택 선까지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중국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매복, 우회, 분할 등 그들만의 장기를 발휘하여 전세를 일거에 뒤엎었다. 펑더화이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북한과 중국에서는 승전으로 국방부장 겸 부총리로 승승장구하였다.

펑더화이는 삼국지 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와 조자룡을 합쳐 놓은 듯한 인물이다. 용맹하고 성질 급한 것은 장비를 빼닮았고 충직하고 담대함은 조자룡을 뛰어넘는다. 그는 마오쩌둥과 동향으로 후난성 샹탄현 출신이다. 필자는 중국 여행 때 마오쩌둥의 생가와 펑더화이의 생가를 보러 갔는데 펑의 집이 훨씬 후미진 산골이었다. 그곳에 가서 펑더화이의 두 아우도 혁명 과정에서 희생되었음을 처음 알았다. 펑더화이는 빈농의 자식으로 소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소년가장이 되었다. 머슴, 소년광부, 동정호 제방 수리 인부 등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먹고 살기 위해 국민당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사병에서 시작하여 국방부장에 입각했으니 오로지 그의 실력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 기댄 것이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자 공산당은 장시성에서 난창(南昌)봉기를 일으키며 혁명군대를 창건하였다. 펑더화이는 1928년 후난성 핑장(平江)에서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펑더화이의 부대는 역시 징강산에 가서 마오쩌둥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국민당군의 토벌로 징강산에서 후퇴한 홍군은 그 후 난창의 봉기군과 합류하여 장시성 루이진(瑞金)에 소비에트 수도를 건설하였다. 국민당군의 토벌로 루이진을 빼앗기고 대장정에 나서자 펑더화이는 두 개의 홍군 주력부대 중 1개를 맡아 지휘하게 된다. 그때부터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군사노선을 견결하게 지지하며 무력으로 뒷받침하였다. 주력부대 하나를 맡았던 린비아오(林彪)가 군대의 지휘권을 펑더화이에게 넘기자고 주장하자 단호히 반대했으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스스로 당중앙을 선포했던 4방면군 지도자 장궈타오에 맞서 지도부를 견결히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북의 옌안부근까지 추격해온 국민당군을 일거에 섬멸시켜 공산당이 서북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마오쩌둥은 말위에서 큰 칼을 비껴든 이가 누구인가? 바로 나의 펑대장군일세.”하는 시를 지어보내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시기 펑더화이는 백단대전을 일으켜 지휘하였다. 백단대전은 팔로군이 일본군에 맞서 백 개 연대를 동원한 작전으로 공산당의 상징적인 항일전투가 되었다. 이로써 공산당은 항일전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얻게 되었으며 힘을 얻어 일본군의 근거지 후방에 대규모 해방구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해방구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된다. 국공내전 때 펑더화이는 지도부가 자리잡은 섬서성 연안의 수비 책임을 맡았다. 국민당군 30만 대군에 맞서 펑더화이는 휘하병력 3만 명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지연전과 소모전을 펼치며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마침내 섬서성은 물론 칭하이, 간쑤, 닝샤 등 광대한 서북은 물론 신장 위구르 자치구까지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의 지도부 대부분이 참전에 반대하였다. 국공내전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때였고 5년간의 내전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미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할 수는 없다. 내전 승리까지 몇 년 더 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며 마오쩌둥의 참전을 뒷받침하였다.

대약진운동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펑더화이는 감연히 당안의 관료주의와 철강생산 방침을 비판하였다. 1959년 장시성 루산에서 열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당의 실책과 오류를 비판하였다. 그러잖아도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던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편지에 격노하였고 펑과 동조하는 이들을 반당 반혁명으로 비판하여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후 펑더화이, 황커청, 시중쉰(시진핑 서기의 아버지) 등이 잇따라 실각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펑더화이는 서북의 광산 개발 등 한직에 있다가 홍위병들에게 끌려왔다. 조리돌림과 구타 등 온갖 수모를 겪던 펑더화이는 4인방의 표적이 되어 장기간 연금상태에 처해졌다. 그들은 펑더화이가 암에 걸려 사망하자 다른 이름으로 화장하여 골분을 섬서성에 안치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펑더화이는 바로 복권되었으며 뼛가루를 후난성 샹탄의 고향마을 뒷산에 안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펑더화이의 생가는 물론 묘소까지 성역화되어 커다란 동상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펑더화이는 권력의 정점에서도 비판과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나는 주석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따질 일이 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철의

[혁명과 배신의 시대] 박헌영을 대리하는 조공중앙 그룹의 사상가 박치우



제9호 [혁명과 배신의 시대] 

박헌영을 대리하는 조공중앙 그룹의 사상가 박치우

1959년 신동엽은 진달래 산천에서 산사람들을 노래하여 탄압받았다.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쳐 산으로 갔고, 산으로 갔기에 산사람이 되었을 뿐, 그 싸움은 그들에게 영예도 과오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모순을 파악하고 그 모순을 깨는 실천에 온몸을 내던졌을 뿐. 여기 산사람들의 선생님이 있다. 이 나라 노동자들은 박치우(朴致祐)라는 이름 석 자를 알아야 한다. 1949124일 서울신문과 동아일보는 신태영 육참총장의 기자회견을 보도했다. "19491120일 무렵 태백산지구 전투에서 적 괴수 박치우를 사살했다.“

박치우(1909~1949) 향년 40. 함경북도 경성출생, () 박창영은 성진중앙교회 목사·함북노회장, 시베리아 선교. 1933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조수(助手) 임용. 1936󰡔조광󰡕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로 등단, 이후 신남철·김오성 등과 함께 신경향 평론가. 1938년 숭실전문 교수,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이원조(이육사 동생)와 교유. 1945810일 중국 북경에서 해방을 맞음. 장춘(신경)에서 두 달간 활동하고 서울로 돌아옴. 194512월 김태준·이원조와 함께 조선문학동맹 평론부 위원. 19462월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서 국수주의 파시즘화의 위기와 문학자의 임무특별보고, 󰡔현대일보󰡕 창간, 발행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선전부위원. 221일 김태준·신남철·임화·김순남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 교육 및 문화대책연구회 위원, 이해에 저서 󰡔사상과 현실󰡕(백양당) 발간. 󰡔현대일보󰡕 발행인 및 주필. ‘대성출판사실질사장으로 사장실에서 여운형과 수시로 바둑 회동(고 성대경 증언). 1945~1946년 북에서 열린 6차례의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담에 4차례 박헌영을 수행하여 배석. 19471월 미군정 탄압을 피해 북행(北行)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에서 활동. 194710월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박순철). 19499월 조선인민유격대 제1군단 정치위원으로 남행(南行). 194911월 경북 영덕에서 칠보산 가는 길목 백암산 보이는 곳에서 전사.

박치우는 모국어, 일어는 물론, 영어·로어·독어 등 어학에 정통한 1세대 서양철학자였다. 그가 쓴 돌아가는 맹자라는 글은 한학에도 깊었음을 알려 준다. 손꼽히는 문학평론가로 경성제대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바이올린도 켰다. 부인 김정숙은 숙명여고 농구선수. 박치우는 함경도 사투리가 억셌다. 조선공산당 2대 재정부장 성유경과 강동정치학원 강사 김원주의 외아들 성일기(차진철)가 강동정치학원으로 찾아가자 이렇게 말했다.

, 너 어마이 니 오는거 며칠째 눙이 빠지라고 기다렸당이. 내가 날래 기별했응이 시방 꼬부데게 오는 중일끼다. 쬐끔만 기다려 봐라.” 남에서 온 청년들은 모두 빨치산으로 ()복무하라는 김일성쪽 결정이 중앙당 이름으로 내려와, 성일기는 회령 제3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때 박치우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붙였다가 떼면서 성일기에게 이르기를, “봅세, 사람은 말이오. 동그라미를 꼭 끼면 답답해서 못 쓴당이. 이렇게 좀 늦춰서 살아야 한당이라 했다.

그러나 열일곱 소년에게 이렇게 늦춰서 살라고 당부했던 억센 함경도 사투리 박치우 선생 자신은 1945810일 북경에서 라디오로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 무렵은 이육사(이원록·)가 북경으로 망명해 있던 시기이다. 북경 일본헌병대는 이육사와 이병희(경성콤그룹)를 쫓고 있었다. 이육사는 어머니상으로 안동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가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주소지 경북경찰서의 관할을 넘어, 북경 일본군헌병대가 조사해야 했던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이육사는 고문받다 순국했다. 박치우는 해방을 맞아 장춘의 거점을 거쳐 2달 뒤 국내로 들어와 19467월 이원조(이원록 동생)가 만든 잡지 大潮에서 건국동원과 지식계급을 주제로 좌담회를 하였다. 이 시기 박치우는 조선공산당 중앙그룹의 사상가로,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으로 2년간 일했다. 그리고 194911월에 전사했다. 이태의 남부군에 나오는 경성제대 출신 철학교수가 박치우다. 박치우는 주검도 다른 지도자들처럼 목 잘린 사진으로 미군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신태영이 발표를 미룬 2주간 동안 미군 정보부는 강동정치학원 정치 부원장 박치우에 대해 온갖 조사를 끝내고 한국군에게 발표를 허락했을 것이다.

앞으로 박치우가 북경에서 이육사와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야 하고, 박치우 전집도 내야 한다. 김일성대 만든 러시아동포 박 일은 박치우의 맑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깊이는 놀라울 정도였다. 한문실력도 뛰어나 개인적으로 한문을 배운 적도 있다. 사석이긴 하지만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기개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고 말했다.

2020년 한홍구는 조선에 반미론자가 없는 이유라는 박치우의 글을 보고 후천성 반미결핍증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한겨레에 썼다. 한 씨는 남한에 박헌영 미제간첩설을 널리 퍼뜨린 김남식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다. 묘한 인연이다. 지금도 한 씨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라거나 박치우가 반미결핍증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남한 노동자·민중들은 이런 저주술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비, 1996) 197쪽에는 박치우가 朴昇龍(朴治宇 1907 함북 경성)으로 나온다. 박승룡과 동일인인 朴治宇朴致祐는 한자 이름과 경력이 다르다. 해방 전 박승룡과 해방 후 朴致祐朴治宇 한 사람으로 틀리게 설명하기에 바로 잡는다.

류승완



[문화] 나는 사장님이 아니로소이다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 어제도 들었다 . “ 사장님 ,  이 제품 한번 써보세요 ”  마음속 깊은 곳에서  “ 저 사장 아닌데요 .  초면에 왜 그런 험한 말씀을 하시죠 ?” 라는 말이 올라와 목구멍을 간지럽히지만 ,  그저 웃으며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