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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중국혁명가] 천겅(陳賡), 두 번이나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다

 

이철의

천겅은 인민해방군이 자랑하는 상승장군이다. 난창기의, 장정, 항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천겅은 지략과 용맹함이 뛰어나고, 모략과 지하공작에도 능하여 마오쩌둥이 필요한데 쓸 수 있는 특급 조커와 같은 인물이었다.

천겅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재학 중 황푸 3걸로 꼽혔다. 천겅을 눈여겨 본 장제스는 그를 경호중대장으로 임명하여 신변에 두었다. 장제스가 군벌 천중밍과 싸울 때 사면포위를 당한 일이 있었다. 형세가 절망적이어서 장제스는 권총을 빼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때 천겅이 장제스를 부축하고 등에 업으며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광저우 상단의 반란 때 천겅은 또 한번 장제스를 구출하였다. 상단 두목이 칼을 빼어 장제스를 치려는 찰나 천겅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제압하였던 것이다. 장제스는 천겅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공산당에 입당하지 마라 젊었을 때는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데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천겅은 출세가 보장되는 장제스를 마다하였다. 오히려 난창기의를 일으키고 누구보다 투철한 투사가 되어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천겅(1903-1961) 후난성 샹샹현 출생. 무장집안 출신으로 조부가 후난군 장군이었다. 무산계급 혁명가, 군사가, 중국 인민해방군 대장, 국가와 중국인민해방군의 우수한 영도자, 신중국 국방과학기술, 교육사업의 기초를 닦은 사람(중국 공산당 홈페이지) 천겅은 192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소련에 유학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1927년 난창기의에 참가하였고 다음해부터 상하이에서 중공 중앙 특과에서 복무하였다. 특과는 비밀공작을 하는 임무로 정보수집, 요인 경호, 체포된 당원의 구출등 특수임무를 수행하였다. 1931년에는 홍군 4방면군 사단장으로 있다가 부상을 당해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쑹칭링(쑨원의 부인)등의 구명활동에 힘입어 위기를 넘겼다. 쑹칭링은 장제스에게 “그가 두 번이나 당신을 살렸지 않느냐? 그러니 죽이지 마라.”고 적극 권하였다. 장제스는 천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후중난, 두위밍등 동기들을 보내 설득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상하이를 탈출한 그는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로 갔다. 장정 때 천겅은 간부연대 연대장을 맡아 당 중앙의 요인들을 경호하였다. 그 후 그는 남정북전을 하며 일본군, 국민당군과 싸웠으며 어디에서도 패하지 않는 상승장군이 되었다. 그는 1950년 쓰촨성 시창(西昌)에서 마지막 남은 후종난군을 격파하여 대륙을 통일하는데 마침표를 찍었다. 뿐만 아니라 윈난성에 남아 재기를 도모하던 국군 잔병을 완전히 소탕하였고 일부는 베트남으로 탈출하였다.

천겅은 1950년 베트남을 방문하여 프랑스와 투쟁중인 베트남군을 지지응원하였으며, 1951년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사령원이던 펑더화이가 신병으로 귀국하자 사령원 직무대리를 맡아 중국군을 지휘하였다. 1952년 7월 해방군 군사과학공정학원 원장에 취임하여 중국군 현대화를 도모했으며, 해방군 부총참모장, 국방부 부부장등으로 재직하였다. 1955년 대장계급을 받았으며 1961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연애편지를 벽에 붙인 천겅의 부인

천겅은 성격이 활달하고 직선적인데다 유머가 풍부하였다. 1926년, 공산당 5차 전국 대표대회 때 천겅은 참석한 왕건잉(王根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는 왕의 바로 옆자리에 앉더니 펜을 꺼내어 구애하는 편지를 썼다. “왕건잉 동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정중하게 구혼하니 나에게 시집오기 바랍니다.” 천겅은 옆에 있는 동지를 시켜 왕건잉에게 주었다. 왕건잉은 느닷없는 구애 방식에 화가 나 편지를 벽에 붙여 놓았다. 천겅은 다시 편지를 썼는데 왕은 마찬가지로 벽에 붙여 두었다. 천겅이 세 번째 편지를 썼지만, 이번에는 읽지도 않고 벽에 붙였다.

휴회 시간에 참석자들은 모두 벽 위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되었다. 왕건잉은 1906년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9살의 나이에 방직공장의 아동 노동자가 되었다. 1923년 왕건잉은 중국 공산당 산하 조직이 개설한 노동자야학에 들어 혁명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음해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한 그는 1925년 반제애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투쟁 중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왕건잉은 상하이에서 세차례의 무장기의에 참가했으며 1927년에는 공산당 제 5차 대회에 상하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천겅과 혼인한 그는 중공 중앙 특과에서 천겅을 보좌했다. 1931년 천겅이 당의 명령으로 어이완(鄂豫皖: 후베이 후난 안후이 경계에 설립한 소비에트) 소비에트로 떠났을 때 왕은 상하이에 남았다. 그는 상하이 비밀공작 중 국민당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저우언라이 등 중공 중앙이 그를 구출 해냈다. 옌안으로 간 왕건잉은 당의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갔다. 팔로군 129사단 정치부 재정간부학교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던중 일본군의 기습때 전사하였다. 그때 그는 무사히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났으나 빼놓고 온 문건을 가지러 갔다가 적과 조우했다고 한다. 1939년 전사했을 때 왕건잉의 나이는 33세였다. 천겅과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5년 뒤 천겅은 팔로군 문선대원이던 푸야(傅涯)와 재혼하였다. 푸야의 기억에 따르면 천겅은 구혼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첫째, 나는 당신의 혁명사업에 대한 신념을 존중할 것이며 진보하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나는 당신이 내 주변에서 비서로 일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천겅대장’이라는 연속극에 보면 푸야는 천겅에게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발을 닦아야 한다.” 위의 세가지는 기록에 있는 사실이고 아래는 재미로 덧붙였을 것이다. 신중국 성립 후 푸야는 베이징시에서 일했다. 그녀는 왕건잉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이들과 똑같이 키웠다. 왕건잉의 일기를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홀로 남은 왕의 모친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냈다고 한다.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중국혁명가] 공산당 섬북 근거지 개척자 류즈단(刘志丹)

  

이철의

중국은 본래 개인숭배를 엄격하게 억제했던 전통이 있다. 1949년 1월, 대륙의 내전에서 승리가 분명해질 무렵 공산당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런 결의를 하였다. “생일 잔치를 하지 않고, 선물을 주지 않으며, 술은 조금만 권하고, 박수는 적게 치고, 사람 이름으로 지명을 만들지 않고, 중국 동지를 마르크스 레닌과 같은 반열에 두지 않는다.” 이 규정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으니 바로 류즈단의 이름을 딴 즈단현이다. 본래 바오안(保安县)으로 류즈단의 출생지였는데 1936년에 전사한 그를 기려 이름을 바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유일한 지명을 갖게 되었을까?

1934년 공산당은 국민당의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해 각지에 건설한 해방구를 탈출하였다. 장시성의 루이진에 있던 중앙소비에트도 2만 5천리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0만명의 인원이 8천명으로 감소한 고난의 대행군이었다. 장시, 후난, 윈난, 구이저우, 쓰촨을 거친 장정 도중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파로부터 지도력을 넘겨받았다. 4방면군 지도자 장궈타오와 장정 노선을 놓고 충돌하던 마오와 중앙 지도부는 “북상항일”을 주장하며 쓰촨성에서 섬서, 간쑤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쓰촨성을 벗어난 마오쩌둥은 우연히 입수한 신문을 보다가 섬서성에 비교적 건실한 해방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바로 류즈단, 가오강 등이 건설한 산간(陕甘) 소비에트로 섬서성과 간쑤성에 걸쳐있는 해방구였다. 비로소 확실한 목적지를 확인한 마오쩌둥은 장정 대오를 이끌고 섬북에 자리잡았다.

류즈단.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중국 공농홍군 고위 지휘관,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군사가, 서북 홍군과 서북 혁명근거지의 주요 창건자중 한사람. 1996년 중국 인민해방군 36명 군사가에 포함, 2009년 신중국에 공헌한 100명 인물에 포함(중국 공산당 홈페이지에서 인용) 류즈단은 1903년 섬서성 바오안현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 류린(榆林) 중학(한국의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학생회 주석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24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고 다음해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의 지시로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국민혁명군 4로군 정치처장 등을 맡으며 북양군벌과 전투했다. 1927년 국공합작이 파탄하고 그는 후베이, 안후이, 섬서성 등에서 군사봉기를 기도하였다. 1928년 류즈단은 동지들과 함께 마침내 웨이화(渭华) 기의(중국은 봉기를 기의로 표기한다.)를 일으켜 서북 공농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서북 반제동맹군을 조직하여 부총지휘 및 참모장을 맡았는데 나중에 중국 공농홍군 섬감유격지대로 발전하였다. 1932년 중국 공농홍군 26군이 성립되었을 때 류즈단은 지휘자가 되었다. 1935년 류즈단이 지휘하던 26군과 25군이 합병하여 중국 공농홍군 15군단으로 확대되어 그는 부군단장과 참모장을 맡았다.

섬북이 공산당의 최종 정착지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류즈단과 그의 동지들은 국민당군의 세차례에 걸친 포위토벌에 맞서 싸웠다. 중과부적의 불리한 조건에서 류즈단은 “공기무비, 출기불의(적이 허술한 곳을 치고 예상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는 전술)의 전법으로 아홉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공산당 중앙 노선도 격변을 거듭하는 시기여서 마오쩌둥도 장정 도중에 보구, 리더 등으로부터 지도력을 빼앗았다. 리리싼, 왕밍 등의 좌경 기회주의 노선은 전국 각지에 영향을 미쳐 많은 이들이 혼란 속에서 이른바 숙반(숙청의 다른 말)을 겪어야 하였다. 이때 류즈단도 좌경 기회주의의 모자를 썼다. 계속되는 군사행동 속에서 의견 차이와 주도권 다툼이 그런 일을 만들었을 것이다. 1935년 부대를 합병한 뒤, 류즈단은 기회주의자로 모함을 받아 체포되어 생명을 위협받게 되었다. 그때 마침 마오쩌둥과 중앙 지도부가 섬북에 도착하여 그를 구해냈다. 석방된 류즈단은 서북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임과 북로군 총지휘, 홍군 25군 사령을 맡았다. 1936년 그는 당의 명령을 받고 산시성으로 동정에 나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마오쩌둥은 나중에 비문을 쓰기를 “군중의 영수, 민족의 영웅”이라고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비문에서 “5천년 역사에 영웅이 많지만 인민의 영웅은 류즈단을 꼽는다”고 하였다.

시중쉰(习仲勋)은 지금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부친이다. 그는 류즈단 휘하에서 활동했는데 나이 차는 열 살 아래였다. 그는 19세 때 처음 류즈단을 만났다. 그는 1998년 류즈탄 탄생 95주년에 이렇게 썼다. “즈단 동지는 나보다 열 살 위이다. 그는 좋은 선생이자 영도자였고, 좋은 형이자 친구였다.” 시중쉰은 13세에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5세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는 류즈단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혁명과 전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을 때 그는 보통의 전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소박했으며 다가가기 쉬웠고 항상 전사들과 함께 하였다. 동지들은 그를 ”류형“으로 불렀다.”

중국은 땅도 넓고 인물도 많다. 각지에서 활동한 혁명가들이 스스로 근거지를 개척하며 당의 노선을 관철해 냈다. 신사군을 이끌던 천이도 당과 몇 년동안 연계가 끊어져 있었지만 연결되었을 때 금방 당의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해 냈다. 이처럼 통일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2024년 9월 1일 일요일

[중국혁명가] 한위건과 장지락의 엇갈린 운명

 

이철의

장지락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본명이다. 김산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불굴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로 일제와 맞서 싸웠으나 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자신이 투신하여 활동한 중국 공산당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는 1983년이 되어서야 중공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장지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2008년 정부수립 기념식 때 그의 아들 고영광을 초청하였다.


한위건은 
‘아리랑’에서 장지락의 복당을 막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김산이 칼을 가지고 가서 한위건에게 “5분 안에 돌중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한이 울자, 그는 칼을 놓아둔 채 나와 한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실은 한위건의 입당을 장지락이 먼저 막았고 나중에는 한이 장의 복당에 반대하였다. 두 사람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서로 대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제와 국민당의 밀정이 횡행하는 가운데 벌어진 비극이었다.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국민당의 밀정으로 오인받아 희생되기도 하였다. 결국 김산은 옌안의 정풍운동 시기에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이자 간첩” 혐의를 쓰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한위건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 그는 1896년 함경남도 홍원(현 신포시 신풍리)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용원사립학교를 졸업한 뒤 오산학교에서 수학하고 경성관립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3.1 운동 직후 그는 경성부에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위건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비판하며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 ‘신대한(新大韓)’에 참여하였다. 192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참가하여 총무를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을 벌였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귀국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 한위건은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신간회 발기에 참가하였다. 그해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했고 1928년 2월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한위건은 중국에 머물며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며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가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티에푸(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썼는데 공산주의자협의회, 학생공산당,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북평은 베이징의 당시 이름이다)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위건은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허베이성 베이핑시(北平市) 당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공 허베이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는 리리싼, 왕밍등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에 맞서 노선투쟁을 벌이다 출당되었다. 한위건은 ‘화선(火線: 전선이라는 뜻)’을 발행하여 당의 극좌노선을 비판했다. 그는 국민당 지역에서는 합법활동으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티에푸 노선은 우경 청산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며 한위건을 허베이성 선전부장직에서 해임하고 곧 출당하였다. 그의 아내 장수안(張秀岩)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공산당과 연결이 끊겼지만, 그는 1935년 텐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공산당은 장정 중에 마오쩌둥이 지도부가 되어 왕밍, 보구등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을 변경했다. 1936년 봄 한위건은 중공 북방국 서기 류사오치에 의해 허베이성위원회 서기겸 톈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1937년 5월 옌안(延安)에서 당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 지구 대표로 참석했다. 그때 한위건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었다. “화북당이 한때 중앙의 모험주의 노선에 날카롭게 반대하였다. 그 영수가 바로 리티에푸 동지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탁상공론을 일삼는 이들로 주관주의자들이다. 다른 이는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공론보다 시기, 지역, 조건을 고려하여 활동하는데 유물변증법의 혁명관이라 할 만하다. 류샤오치와 리티에푸같은 사람들이다.”

옌안에서 한위건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본래 지병이던 폐결핵에 장티푸스가 겹쳤다. 당은 한위건을 허베이성위원회와 텐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으나 옌안에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1937년 7월 10일 한위건은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은 한위건(리티에푸)의 추도회를 열었으며 신중화보에 그의 약전을 실었다. 한위건의 유체는 옌안 칭량산(清凉山)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한위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장지락과 한위건은 다같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 둘 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국민당에도 맞서 싸웠다. 한사람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다른 이는 투쟁하다가 병마에 시달려 요절하였다. 장지락은 불행하고 한위건은 영광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지락은 님웨일즈에게 거듭 한탄하였다. “광동 코뮨에서 조선독립의 정수라 할 만한 동지들이 모두 죽었다.” 이처럼 혁명 과정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투쟁할 뿐이고, 죽고 사는 것 또한 조건과 선택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중국혁명가] 문화대혁명으로 스러진 마오쩌둥 후계자노동운동 출신의 혁명가 류샤오치(劉少奇)

[중국혁명가]


이철의

류샤오치는 1898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인데 마오쩌둥보다는 다섯 살이 적다. 그는 적지 않은 기간 마오쩌둥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끝내 마오에 의해 국가주석직에서 해임당하여 실권한 뒤 문화대혁명 때 병사했다. 1981년에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훗날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그를 기려 이렇게 말했다. “류샤오치 동지는 중국혁명과 건설에 전심전력, 노심초사하였다.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외교와 당의 건설들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다. 그는 전당과 전군은 물론 전국 인민들의 깊은 흠모를 받고 있다.”

류샤오치가 태어난 닝샹현(寧鄕縣) 탄즈충(炭子冲)은 마오쩌둥의 고향 샹탄현 샤오산(소산), 펑더화이의 고향 샹탄현 우스 마을과 각각 30킬로 거리에 있다. 인근에서 공산당 주석과 후계자, 그리고 최고 군사지도자가 태어난 것이다. 류샤오치는 1919년 중학을 졸업하고 1920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1921년에는 소련의 모스크바 동방 공산주의노동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해 창립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 귀국한 그는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장시성의 안위안(安源)의 탄광으로 가서 리리싼과 함께 광부들의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안위안 광부클럽의 주임을 맡았으며 1925년에 전국 총공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상하이, 광저우, 우한에서 반제투쟁을 벌이고 홍콩·광저우 대파업 투쟁과 우한과 한커우의 영국 조계 반환투쟁에 참가했다.

1927년 중공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공합작이 결렬된 뒤 허베이, 상하이, 동북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였다. 193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련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어 현지에서 근무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 6차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어 귀국했다. 그는 전국 총공회의 당서기를 맡았고 당내의 폐쇄주의와 모험주의 노선에 제동을 걸었다. 류샤오치는 “국민당 통치지역에서는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장기간 은신하며 역량을 비축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 시기 리리싼과 취추바이 등을 대표로 하는 당내 지도부의 모험주의와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1932년에는 장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며 푸젠성 당서기를 맡았다. 1934년부터 장정에 참가했는데 1935년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다. 1936년에 화북에서 중공 북방국 서기를 맡았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화북에서 군중을 고무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며 항일근거지 확장에 종사했다. 1938년에는 중공 중원국 서기를 맡아 화중 지역의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투쟁을 벌였으니, 험지에서 종횡무진한 것이다. 1941년 국민당이 환남사변을 일으키며 공산당 신사군을 공격, 주력을 궤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류샤오치는 화중으로 가서 신사군 정치위원겸 화중국 서기를 맡아 천이(陳毅) 등과 함께 무너진 군을 재건하였다. 1943년 옌안으로 간 그는 중공 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장제스와 국공담판을 벌일 때, 류샤오치는 옌안에서 중공 주석대리를 맡았다. 1947년 국민당군이 옌안을 점령하자 중공은 지도부를 나눴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지도하고 류샤오치와 주더는 화북에서 전국의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 그는 정부 부주석을 맡았으며 1954년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1956년에는 중공중앙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1959년에 류샤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방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천만명이 아사하는 가운데 마오쩌둥은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류사오치는 조급한 집단화와 경제계획에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갈등관계에 있는 소련과의 관계복원을 원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천윈 등 지도부는 인민공사를 합작사로 되돌리고, 자영농지를 허용하며, 작은 개인기업을 허용하는 등으로 경제회복을 꾀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당이 대중을 멀리할 뿐 아니라 지식분자의 “우파경향”, 농민의 “자본주의로 가는 자발적 경향”과 “소련의 수정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을 방조하거나 방치한다고 생각하였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리지 않아 “사실상 밀어낸”것으로 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해임한 뒤 암암리에 반격을 꾀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뒤 류샤오치가 중소동맹 복원을 건의하자 마오쩌둥은 그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한 것처럼 자신을 밀어낼 것으로 생각하였다.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상황이 좀 더 분명해졌다. 1968년 류샤오치는 “당내 주자파, 반혁명분자”가 되어 타도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는 모든 직무에서 축출되었으며 후계자 자리는 린비아오에게 돌아갔다. 그는 당에서 제명된 뒤 가택연금이 되어 홍위병들의 습격과 폭행을 당했다. 이후 송나라의 고도 카이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당뇨병, 폐렴이 악화되어 1969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980년 공산당의 류샤오치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복권되었다.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중국혁명가 열전] 마오쩌둥 혁명을 위해 일가를 희생하다

  

  [중국혁명가 열전]

 마오쩌둥 혁명을 위해 일가를 희생하다

 

이철의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이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성립하기 전까지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혁명이론 수립 및 당의 지도, 전략 및 전술의 수립, 전쟁 및 전투지휘에 이르기까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그늘로 빛이 바랬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사는 그를 가리켜 “위대한 맑스주의자이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전략가, 이론가. 중국의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영웅. 중국 인민을 영도하여 명운을 개척했으며 국가 면모를 일신한 일대 위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오쩌둥이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여기서는 혁명과정에서 희생한 그의 가족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투신한 뒤 여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아우로 마오쩌민(毛澤民)과 마오쩌탄(毛澤覃)이 차례로 희생되었고 아내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국민당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촌 누이인 마오쩌지엔(毛澤建),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조카 마오추슝(毛楚雄)을 차례로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도 모두 죽거나 다른 사람이 겪지 않을 고통을 받았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 잡혔을 때 후난성의 군벌 장군 허젠(何鍵)은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퇴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마오쩌둥은 양카이후이의 소식을 듣자 “내가 백 개의 목숨이 있더라고 바꿀 수 없다.”고 비통해했다고 한다.

양카이후이가 국민당군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세 아들은 상하이 공산당 지하당에 맡겨졌다. 상하이당이 파괴되자 세 아들은 유리걸식하며 유랑하게 되었다. 셋째 마오안룽(毛岸龍)은 유랑과정에서 실종되었다. 첫째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고 둘째 마오안칭(毛岸靑)은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지만, 유랑과정에서 머리를 다쳐 평생 고통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언젠가 아들들의 유랑과정을 회고하며 “어린 나이에 백가(百家)의 밥을 먹었다.”고 탄식하였다. 즉 구걸하거나 남의 집에 얹혀 지냈다는 뜻이다.

마오쩌둥은 두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서도 여러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끝까지 남은 것은 딸 리민(李民)뿐이다. 첫 번째 딸은 마오쩌둥이 징강산 근거지를 빼앗긴 뒤 후난성과 장시성 등을 전전할 때라서 남에게 맡겼다. 그는 우는 허쯔전을 이렇게 달랬다. "아이를 맡기자. 혁명 투쟁에 승리한 후, 다시 데려오자."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둘째 아들 마오안훙(毛岸紅)은 장정을 출발하며 아우 마오쩌탄 부부에게 맡겼다. 마오쩌둥은 소비에트 은행 책임을 맡고 있던 요인이었다. 마찬가지로 불안한 신분이던 마오쩌탄 부부는 아들을 어느 경호원의 집에 맡겼는데 끝내 행방불명되었다. 국민당군이 루이진(瑞金)을 비롯한 장시성의 소비에트를 이 잡듯 뒤져 공산당원과 동조하던 민중들을 학살했으므로 함께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허쯔전은 국민당군이 루이진의 소비에트를 포위 토벌할 때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 쫓기는 환경에서 아이를 조산한 결과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의 부인 중 팔자가 기구하기로는 허쯔전이 손꼽힌다. 그는 장정 도중에 다시 딸 하나를 출산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 부부는 어느 농가에 아이를 맡겼는데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쯔전은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탄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고 그 여파로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운명이 되었다. 허쯔전은 옌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리민을 낳는다. 리민은 소련으로 정양하러 간 어머니를 따라갔으며 귀국 후에도 허쯔전을 보살폈다.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정양 중 마지막 아들을 출산했으나 금방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이혼하는 처지가 되었다. 마오쩌둥의 자녀 중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세 번째 부인 장칭(姜靑)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나(李訥)이다. 그는 마오쩌둥 장칭 부부의 슬하에서 순조롭게 성장했으나 문화대혁명 후 어머니가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마오쩌둥 일가 중 비교적 알려진 이는 맏아들 마오안잉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자원하였다.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이던 펑더화이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아들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아들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식들을 출전시키겠는가?” 하지만 마오안잉은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네이팜탄에 시신이 새카맣게 타서 손목에 찬 소련제 시계를 보고 신분을 겨우 확인했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전사를 알게 된 펑더화이는 직접 전문을 기초하여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방에서 자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기밀비서 예즈룽이 말없이 전보를 건네자, 마오는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는데 기록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라고도 하고 아무 표정도 없었다고도 적혀 있다. 마오는 낮은 목소리로 예즈룽에게 말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른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데 한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는 없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릉에 있다. 중국으로 이장하는 문제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인민의 자식들도 조선에 묻혀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문화] 99%인 ‘우리’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

  박현욱 ( 노동예술단 선언 ) (20 호에서 이어짐 ) 99% 인  ‘ 우리 ’ 라는 집단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 문화적으로 답해보자고 했다 .  해서 좀 철지나긴 했지만 옛 드라마 얘기 좀 해보련다 . 2009 년도에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