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9일 수요일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만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 중

 지난 75년간 단 하루도 민주적이지 않았던 민주주의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누가 들어도 명백히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이러한 모순 어법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석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현 상황에 따라붙는 의문이다.

시위의 발단은 지난 1월 4일 이스라엘 정부의 레빈 법무장관과 의회의 로스만 헌법위원회 의장이 발표한 사법 개혁안이 도화선이었다. 이안의 골자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과 정부의 행정 명령 등에 대한 대법원의 심사 권한을 무력화하고, 법관선정위원회의 구성을 정부와 여당이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하며, 독립성이 보장된 각 부처의 법률 고문들에 대한 임명권과 그들의 법률 해석에 구속받지 않을 권한을 장관들에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삼권 분립을 무너뜨리는 시도라는 반발이 즉각 터져 나왔다. 해당 발표가 있은 주말부터 12주 연속으로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수십만 명이 모인 집회와 파업, 단식농성이 이어졌다. 여기에는 바락 전 총리나 현 집권 연정의 주축인 리쿠드 당 소속으로 각종 장관직을 두루 거쳤던 치피 리브니, 몇 달 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던 야이르 라피드 등 전현직 정치인들도 동참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모셰 야알론 전 국방장관은 경찰에게 진압 명령을 거부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유대계 언론재벌인 마이클 블룸버그는 「뉴욕타임스」에 이스라엘 정부의 사법 개혁안이 “자유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약화시킨다고 기고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단체 중 하나인 <제이 스트리트> 역시도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인 민주적 가치를 믿는 미국 내 수백만 유대인들”을 우려케 하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3월 30일에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수십 년 친분을 강조해오던 바이든 대통령까지 나서 우려를 표하면서 백악관이 당분간 이스라엘 총리를 초청하지 않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유대계 인구 전체와 맞먹는 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나선 시민들과 야당, 언론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이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과 봉쇄로 인해 일체의 정치적 자유가 막혀 있는 5백만여 명의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있음에도 ‘시민’이 아닌 ‘거주민’에 불과해 투표조차 할 수 없는 동예루살렘의 아랍계 주민들, 이스라엘 인구 가운데 무려 21퍼센트를 차지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시위 참여를 거부당한 팔레스타인 출신 이스라엘 시민권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좌파 연합 <스탠딩 투게더>를 비롯한 이스라엘 유대계 시민들이 끝까지 그들을 배제한 채 ‘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친다면, 이는 결국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단지 ‘유대인만을 위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다.  

                                  최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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