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9일 수요일

1922년 국내중심 ‘조선공산당(內地黨)’의 기둥

 김사국·박원희 부부

조선 여성해방운동의 선구 박원희(1899~1928)와 남편 해광(解光) 김사국(1892~1926). 민족·계급·여성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사람들의 맵고 쓴 운명. 

운동에 바친 짧은 생애와 빛났던 영별식, 그리고 긴 세월 쓸쓸했던 무덤. 김사국이 탄핵한 장덕수 무덤도 가까이 있으니 망우리는 근심과 은원(恩怨)을 함께 잊는 곳인가. 김사국의 동생 김사민, 박원희의 오빠 박광희도 사회주의 민족운동을 했다. 

김사민은 지게꾼과 막벌이꾼들의 ‘자유노동조합’을 만든 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일본인 간수를 칼로 내리쳤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실성하여 종로 거리를 떠돌다 스러져갔다. 조선공산당 2대 총비서 강달영도 똑같이 당하지 않았던가. 김사국은 동경에서 흑도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1922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內地黨)’을 조직했다. 민족주의에서 자율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수용의 전형이다.

무엇보다 그는 ‘창당은 현장과 대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은 상해당과 이르쿠츠크당 어느 편도 아닌 ‘중립당’으로 불렸다. 김사국의 당건설론은 1921년 7월 창건된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에 좌우된 점과 대조된다. 김사국 형제는 국제적 안목도 있었다.

 1922년 김사민은 국제공산청년회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김사국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이듬해 김사국 부부는 만주에서 중립당 ‘간도지부’와 ‘간도공산청년회’까지 조직했다. 김사국은 계급을 우선한 화요파의 반종교운동도 찬성하지 않았다. 

발전한 자본주의가 아닌 식민지 해방운동은 사회주의 바깥 세력과도 손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김사국은 1925년 4월 17일의 조선공산당 창립에서 밀려났다.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두고 입장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이듬해 김사국은 결핵으로 서거한다. 

그의 ‘민족통일전선과 현장중심 당건설론’은 식민지운동의 주체성 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종로 계동 부잣집 딸 박원희는 경성여고보 사범과를 나와 영어교사를 지내고 옥중에서 영어판 헬렌켈러 자서전을 번역했다. 

허정숙·주세죽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 창립 집행위원, 경성여자청년회·중앙여자청년동맹·근우회 집행위원을 도맡았다. 

김사국·박원희 부부가 용정과 영고탑에서 만든 조공(내지당) 지부·간도공산청년회·동양학원·대동학원은 북간도 사회운동과 민족교육의 터전이었다. 

이들이 주장했던 민족통일전선의 작은 보답일까. 부부는 노무현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할머니가 키운 외동딸 김사건(史建)노력 덕분이다. 지금 두 사람 묘비가 남아 있는 망우역사공원 봉분은 김사국 어머니 안국당의 무덤이다.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에 몸바친 혁명부부. 

그 짧은 생애는 다시 살펴보아야 할 큰 뜻이 있다.             류승완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노동자교양예술] 선택적 친화력 – 1809년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 vs 2024년 진보당의 선택적 친화력

한아석 2024 년 총선에서 진보당 ( 그리고 민주노총의 전국회의 정파 ) 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위성정당에 들어갔다 .  진보당이 보수 양당들과는 선거 협력을 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국회의원 배지를 향해 이전투구처럼 하는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