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4일 목요일

조봉암, 진보당 성공 뒤 사법피살

 사회주의 혁명가에서 분단선거와 분단정권 참여

망우역사공원, 조봉암은 만해 한용운 맞은 편에 누워 있다. 터도 양명하고 잘 꾸며 놓았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남긴 까닭은 권력을 누려서가 아니라 권력에 죽임을 당해서이니, 사람은 끝도 중요하다. 항일전쟁기 그의 사회주의 운동은 빛난다. 

장덕수와 비슷하게 열다섯 살에 강화군청 고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군서기를 마다하고 일본에 간 것도 그렇다. 1921년 11월 조봉암은 박열과 함께 흑도회, ‘검은 파도회’를 만들었다. 

이때 김사국도 조선 대표격으로 초청되어 동경으로 갔었다. 조선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은 중국처럼 대개 볼셰비즘으로 정리된다. 

조봉암은 1922년 쏘련 베르흐네스크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고려공산당 통합회의에 국내대표로 참석하고 이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서 공부한다. 1925년 5월 27일, 조공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조봉암을 코민테른 파견대표로 선임하고 전권대표 보좌의 권한을 위임했다. 

그 뒤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상해에서 코민테른 극동위원회 조선담당 위원을 지냈다. 1932년 일제에 붙잡혀 7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그의 처신은 현실주의였다. 1946년 6월 그는 전향선언을 했다. 이 과정은 미 정보기관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승만 밑에서 농림부장관을 했다. 그 무렵 토지개혁은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소작인과 지주의 첨예한 대립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가 이름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미군정과 이승만은 명목상의 토지개혁이라도 치러낼 수 있었을까 싶다. 그가 당시 박헌영 주류파에게 던진 문제의 본질은 남한에서 미군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하는 ‘원칙론과 현실주의의 관계’였다. 

절대무력을 가진 미군정은 남한의 진보세력에게 적대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탄압이면 항쟁’이 원칙이지만, 자칫 사마귀가 수레에 달려드는 꼴이 된다. 

전멸 당하느니 피해서 주역량을 보존함은 대장정의 정신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그냥 굴종하면 다음 세대가 싸울 동력마저 잃게 된다. 어느 쪽도 쉬운 일은 아니다. 현실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조봉암은 다시 이상을 좇았다. 1956년 진보당을 만들어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맞서 평화통일을 내세웠다. 

“공산독재와 자본독재 모두에 반대한다”는 제3의 중도노선을 명시했지만, ‘평화통일론’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 죽이는 ‘사법살인’의 구실이 되었다. 

그가 받은 216만 표가 다음 대선에서 이승만의 506만 표를 이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은 담담하게 갔지만 그의 비서 이영근과 조용수로 이어지는 남한 정치판의 ‘뫼비우스 띠’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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