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일 월요일

짜고치는 집회를 깨부숴

응답하라 1987년 울산. 

우왕좌왕하던 수백 명의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켜

1991년 4월 26일 시위 중 피신하던 강경대 학생을 백골단이 쇠파이프로 구타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어 5월 6일 안양교도소에서 박창수 동지가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치사 당했다. 

이 두 사건으로 노태우 폭압에 저항하는 노동자, 학생, 민중들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불붙었다. 울산에서도 노동자와 시민들이 “노동운동 탄압 규탄”,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파업과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울산의 노조대표자와 민족민주운동 대표자들이 투쟁본부를 결성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는데,집회를 앞두고 정말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투쟁지도부가 “태화강 고수부지까지만 행진한 후 거기서 평화집회를 한 후 투쟁대오를 돌려 자진해산을 한다.”고 경찰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에 치를 떨었고 어떻게 하든 투쟁열기가 넘치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무력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아내야만 했다. 형식적인 집회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에 반발한 우리 노동자들은 집회 전날 학생운동 출신들의 도움으로 화염병 200여 개를 만들었다. 

집회 당일 울산 고속터미널 앞에서 수만 명의 집회대오가 전경들에 의해 차단됐지만, 집회 지도부는 평화시위를 유도하면서 겉으로만 대치했다.

이때 “강경대 학생과 박창수 동지를 살려내라!”며 10여명의우리 대오 노동자들이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경찰 역시 약속 위반이라고 생각했는지,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돌과 화염병, 그리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집회지도부나 경찰 모두 상황통제권을 상실했다. 우리 대오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 앞에서 투쟁을 선도하다가 고속터미널을 우회하여 울산시청으로 돌격했다. 

당시 경찰은평화적 시위라는 집회 지도부의 사전약속을 믿고 울산에 집결시켰던 병력을 부산과 대구의 집회로 분산시켰다. 

갑자기 성난 파도처럼 노동자들이 울산시청 앞으로 밀려들자, 허를 찔린 수백 명의 전경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대오에 의해 체포돼 무장해제 당했다. 너머지 수적으로 밀린 수백 명의 전경들은 울산시청 안으로 도망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됐다.                   전원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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