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혁명과 배신의 역사] 국내 항일유격대 조직한 김태준은 왜 연안으로 갔나?


제10호 [혁명과 배신의 역사]

 

국내 항일유격대 조직한 김태준은 왜 연안으로 갔나?

 류승완


조선문학사 개척자ㆍ훈민정음 해례본 발굴ㆍ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장ㆍ연안 탈출, 국내 항일유격대 조직ㆍ병보석 중 중국 연안으로 망명ㆍ경성대학 직선총장ㆍ지리산, 이 현상부대에 문화선전대 파견ㆍ전향 거부하고 사형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이다. 우리 겨레도 이 만한 혁명가를 가질 수 있을까 싶은 지식인,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金台俊). 명륜전문(성균관대)과 경성제국대학 사이를 오가며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치던 나라에서 첫손꼽는 국학자. 둘째가는 위당 정인보와 동아일보 송진우가 다산 정약용을 끌어들여 실학(實學)라는 허구의 개념을 만들어 내자, 그러려면 차라리 현실학파라고 부르라고 고쳐주던 눈밝은 선생님.

그러면서도 동아일보에 <승려의 성생활>이란 글을 써서 혜화전문(동국대) 학생들이 항의하러 와서 명륜전문 학생들과 실랑이, 웃음거리도 만들어 주었던 그. 항일전쟁 끝 무렵 광분한 일제가 아침마다 대학생들 모아놓고 일본천황에게 절하라고 강요할 때, 혼자 고개 들고 하늘 쳐다보던 사람. 그는 이때 조선지식인 모두가 선망하던 최고직장, 명륜전문 교수 겸 경성제대강사 자리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자발적인 왜놈밀정과 황도유학(皇道儒學)파 득실거리는 명륜전문 뜰에서 누가 감히 황궁요배를 거부할 수 있으랴. 명륜전문에서 9년 가르치는 동안 학생들이 그를 얼마나 따랐으랴.

아직 평치라는 지역차별이 남아있던 시대, 평북 운산 사람 김태준선생은 온화했다. 그의 호 천태산인(天台山人)은 고향 뒷산은 천태산에서 따왔다. 중국공산당 창건자 진독수(陳獨秀)도 청나라 마지막 과거에 뽑힌 수재출신이라 혼자 뛰어나다고 독수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고향에 독수산이 있어 독수산민(獨秀山民)이라 하였다.

김태준은 전공이 중국문학임에도 조선문학사를 연구했다. 그는 지나문학과 제3회 입학생으로, 1회 입학생인 과선배 최창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최창규는 경제연구회 창립회원이다. 또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가 지도교수로 있는 경제연구회에서 맑스주의를 상당수준으로 공부했을 것이다. 이때 미야케는 독일유학 중 독일공산당에 가입한 당원이었다. 경제연구회에서 독일어 원전강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미야케 교수가 서대문 지하감옥에서 탈옥한 이재유를 숨겨주었다가 옥고를 치렀다. 미야케 교수가 투옥됨으로써 경성제대 조선인 학생들의 항일투쟁과 사회주의 수용에 큰 감화를 주었다. 김태준은 경제연구회 사건으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경성제대 지나문학과 1세대로서 그저 졸업만 해도 한국 중문학계의 태두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수업을 들은 북경대 중문과 출신 경성제대 초빙교수 위건공은 현대중국어의 아버지라 불린다. 김태준은 북경 졸업여행길에 위건공에게 부탁해서 노신을 만나려 했다. 마침 노신은 상해로 피신해서 동생 주작인을 만나 실망한 기록을 남겼다. 나아가 노동계급 시각에서 노신도 비판했다. 김태준의 루쉰 평가를 보면 그의 사회주의 수용이 생각보다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현대문학 소개만 했어도 그는 조선 최고의 학자로 영화를 누리고 살 터였다. 그러나 김태준은 조선문학사 연구에 힘써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를 써서 한국문학사를 개척했다. 그 명성은 일본까지 자자했다. 오죽하면 조선어과의 일본인 다카하시 교수가 퇴직한 자리에 조윤제·이희승 같은 조선어과 출신을 제쳐두고 김태준을 뽑았을까. 김태준은 중국에서 궈머러우·루쉰이 했던 학술작업을 조선에서 해내려했다.

그래서 일제가 승전보를 울리던 1930년대에 김태준은 홍길동전 연구(1936), 구운몽의 연구(1936),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1935), 장화홍련전의 연구(1937) 등 우리 눈에 익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시인 임화와 함께 학예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조선문화사 풀어내는 일을 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국내 항일전선에서 뛰어들었다. 그의 투쟁은 일제의 기세가 꼭지점을 찍은 1942년 무렵 경성콤그룹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경성 트로이카가 무너진 뒤로, 박헌영을 추대하고 국내 항일전의 혈맥을 이어가던 경성콤그룹. 김태준은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장으로 이현상·정태식과 함께 국내 항일민족전선을 구축하였다. 일제가 조선말마저 말살하려하자 일제에 굴복하지 않는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은 김태준을 매개로 경성콤그룹과 연대했다. 조선어학회 지도자이자 동덕여고보 조선어교사 신명균은 김태준의 연구실에 비밀리에 박헌영과 만난 뒤 조선어 사용금지에 항의하여 자결하였다. 코민테른 6,7차대회와 조선·베트남·중국 등 동아시아 혁명운동에서 가장 쟁점이었던 민족통일전선 문제는 이렇게 실천적으로 결판났다. 도대체 조선에서 일제에 투항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는 사회주의자들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일제의 사냥이 이어지고 이재유만큼 끈질기게 투쟁하던 이관술은 뜻밖에도 종로 창덕궁 옆 김태준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김태준도 노출되어 체포되었다. 이 시기 김태준은 국내 항일전사에 빛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안동본)의 발굴과 보전이다. 1940년 무렵 김태준은 아끼던 명륜전문 제자인 서예가 이용준에게서 고향 안동처가에 있던 해례본의 존재를 듣고, 경성제대 도서관 이조실록을 확인하여 진본임을 확증한다.

1943년 그 사이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나온 김태준은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을 비밀리에 넘긴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국보 훈민정음 해례 안동본은 일제의 손을 피할 수 있었다. 간송은 김태준의 예상보다 열배의 값을 치루었다. 그때 종로 안 기와집 열채를 살 수 있는 11천원. 이 돈은 김태준의 연안 망명자금과 경성콤그룹 활동 자금으로 쓰였다. 그 속에는 학생조직을 통해서 만든 포천의 백운산유격대 군자금도 들어 있을 터이다. 북송 장기수 이인모에 따르면 1943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명 백운계곡에서, 김태준의 지도 아래 징병·징용 거부자 80여명을 모아서 국내 유격부대를 조직했다.

유격대 책임자는 노동자 김종백. 조직부장은 연희전문 출신으로 김태준의 지도를 받던 학생조직 책임자 정준섭. 군사부장은 일본군 출신 염윤구. 김종백의 백운계곡 유격대는 중앙선 철길 일부를 탈선시켰다. 일제는 경기도 경찰부와 종로·성동·용산·서대문서 병력 3백여 명을 동원해서 백운계곡을 공격하였다. 유격대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살아남아 한국전쟁때 인민군으로 활약했다. 이어 1944년 경성콤그룹 학생부문 책임자 주병포는 평양의 이인모와 연락해서 개마고원에 유격대를 조직하려 했다. 개마고원은 국내 유격투쟁에 알맞은 곳이다. 아마도 인민전선부 군사활동의 일부였을 것이다. 조직원 한명이 체포되면서 개마고원 유격대 결성은 성사되지 못했다. 1940년 경성콤그룹 사건 대응 때 이인모의 연락선이었던 유영준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온 약리학교실 조교로 경성콤그룹 전체학생조직의 책임자 중 한명이었다. 김태준이 연안으로 탈출할 당시 경성제대 의사인 사위의 의사복을 입고 의사로 변복했다. 유영준은 김태준의 사위이거나 그 동료일 가능성이 높다. 1944년 김태준은 국내 공산주의자협의회의 결정으로 국내외 무장세력을 연계하기 위하여 병보석 상태에서 연안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김태준과 이현상의 활동은 1943년 국내 항일유격투쟁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42년 이육사의 외당숙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허형식이 만주 흑룡강성에서 전사했다. 국내 공산주의자협의회가 항일무투가 끊긴 만주대신 연안과 태항산쪽에 힘을 쏟은 배경이다. 이때 김일성 부대는 관할지역을 벗어나 안전한 러시아령으로 무단 월경해 있었다.

김태준은 연안에서 팔로군 포병사령관 겸 조선의용대 대장 무정 장군과 경성콤그룹에서 이미 파견된 여장군 김명시를 만난다. 이 무렵 북경에는 이육사·이병희·박치우가 같은 목적으로 와 있었다. 해방을 맞은 김태준 부부는 걸어서 서울로 돌아와 경성대학 직선총장에 뽑히고, 조선문학자대회를 열어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그리고 꿈에도 잊지 못할 동지, 지리산의 이현상에게 시인 유진오 등 문화선전대를 보낸 죄목으로 민간인임에도 친일파 원용덕에게 군사재판을 받고 사법살인을 당했다.

 

金台俊(1905~1949) 향년 45, 天台山人,

1905년 평북 雲山 출생

1920년 운산공립보통학교 졸업

1923년 영변농학교 2년 수료, 이리농림학교 3년 편입

1925년 이리농림 동맹휴학으로 2개월 근신처분

192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192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지나언어 지나문학과 진학

재학중 경제연구회 활동, 미야케 사건으로 신남철과 함께 연행됨

1930<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 연재

1931년 조선총독부직속기관 명륜학원 강사, 경학원(經學院) 직원(直員)

1933<조선한문학사> 출간

1939년 경성제대학 법문학부 강사/ 경성콤그룹 인민전선부장

1941년 경성콤그룹사건으로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등과 함께 체포됨,

1943년 병보석출옥,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 부인, 아들 사망

1944년 이재유 옥사, 그 부인 박진홍과 재혼, 연안행

19454월 도보로 연안 도착함

194511월 도보로 서울 귀국, 조선공산당 민족문화건설에 관한 테제 발표(김태준이 기초한 것으로 추정됨).

194512월 경성대학 전학대회에서 직선 총장으로 선출됨

1946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차장, 국대안 사건으로 경성대학에서 파면

1946224일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결성대회 개최

1946329일 이조실록간행회 조직

1946410일 민전, 미소공위 대응활동

1946415일 민족문화건설 전국회의 개최

194687일 경찰이 김태준, 이강국, 김오성 가택 수색

19461210일 남로당 1회 중앙위원 및 중앙감찰위원 연석회의

1947130일 민전확대중앙위원회,상임위원과 의장단 정비 강화

1949726南朝鮮勞動黨 문화부장 金台俊 검거 보도

1949930 南朝鮮勞動黨 문화부장 金台俊 사형판결 확정

1949118일 전향을 거부하자 이승만이 사형을 재가, 곧이어 경기도 수색에서 총살당함, 김태준 사형 뒤 설치된 국립서울대 명예박사 1호 맥아더, 2호 하지, 3호 이승만이 차례로 나눠 가짐.

 

○사진1. 김태준과 전형필이 훈민정음을 거래한 인사동 한남서점 표지판



○사진2.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증보판(1939, 학예사)에 시인 임 화가 쓴 서문. 남한에서 유통된 복사본에는 김태준의 이름은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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