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6일 월요일

혁명과 배신의 시대 장덕수

항일과 친일, 미소공위 찬성하다 피살 

깊어가는 가을, 나그네는 망우 역사문화공원 설산(雪山) 장덕수 무덤을 찾았다. 번듯한 묘비에 사회주의 운동과 친일행적이 있나, 찾아볼 일이다. 그 일생은 한국정치의 세력구도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갑오생 장덕수는 1894년 황해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김구가 황해도 동학 아기접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다. 장덕수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이사청 급사, 평양부청 고원을 거쳐 열여덟 살에 조선총독부 판임관 시험에 붙고 동경유학 을 떠난다. 

와세다대학에 들어간 그는 1916년 조선 및 중국인 유학생 들과 신아동맹당을 만들어 일본의 아시아개조론에 반대한다. 이듬해 상해로 가서 여운형을 만나 신한청년단에 관계한다. 

1919년 2월 귀국해서 하의도에 유배되지만 여운형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그의 항일은 겉은 사회주의지만 속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1920년 9월 레닌은 조선의 사회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을 도우려 옛 러시아 황실 금괴 327Kg을 지원했다. 

일본 돈 51만엔, 현재 물가로 적어도 510억원 넘는 돈을 상해 고려공산당이 관리하게 되면서 국내에 일부를 보냈다. 이 무렵 상해당 국내 책임비서였던 장덕수는 동아일보 초대주필로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당조직과 대중조직을 장악하고 막대한 자금력까지 갖춘 조선 사회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 그러나 1921년 가을부터 이르쿠츠크당과 국내조선공산당(내지당)이 장덕수의 부르주아지 협력노선과 자금 독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가짜공산당 사건’이다. 서울청년회의 김한과 김사국이 성토에 앞장섰다. 이로부터 주도권을 잃은 장덕수는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3년 만에 귀국해서 줄곧 동아일보 부사장과 보성 전문 교수를 지낸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행되어 전향서를 쓰고 풀려나자 내 놓고 친일에 앞장선다. 그리고 1945년 8월, 해방이 되지만 친일파 장덕수는 한국민주당의 미국창구로 도리어 더 득세했다. 

미군정 밑에서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미소 공위 참가를 주장하여 이승만 - 김구와 갈등을 빚었다. 송진우와 장덕수는 적어도 ‘독립을 5년간 유예한 뒤 조선인들로 임시민주정부를 구성해서 독립시킨다‘는 모스크바 3상합의를 이해하였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미군정은 김구를 불러 경고했다. 장덕수는 “신탁통치 찬성후 반대”라는 묘한 현실론으로 이승만 • 김구와 대립하다 2년 뒤인 1947년 12월 암살당했다. 

김구는 배후로 지목되어 증인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그리고 2 년 뒤,김구도 뒤늦게 좌우합작에 나서다 암살당한다. 장덕수의 무덤은 그 굴곡진 사연들을 담고 있다.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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