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요일

노동자신문 제18호 (2024.4.18) ★★★


[헤드라인]
 

윤석열 정권 퇴진투쟁, 생활임금 확보 투쟁에서 형성하자

최저임금 대폭 인상, 특수고용ㆍ플랫폼ㆍ프리랜서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확대 적용하라

 

편집국

2024년 임금 투쟁이 시작되었다. 먼저 최저임금을 둘러싼 교섭과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최저임금 관련 요구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 가구생계비로 결정기준 확대, 특수고용,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노동자 등 적용확대, 최저임금 인상효과를 무력화는 산입범위 정상화, 장애인노동자, 수습노동자, 가사노동자 최저임금 적용, 최저임금위원회 회의를 공개하고 방청을 허용하는 등이다. 반면에 자본가 진영은 최저임금 동결이나 지역별ㆍ차등적용을 다시 들고나왔다. 정부와 자본에 끌려다니다 끝나는 임투가 아니라 절박한 생활상의 분노와 요구를 모아 위력적인 윤석열 정권 퇴진투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임금은 노동력의 가격이고 노동력 재생산비, 즉 생계비다. 임금의 크기는 필수적인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생활수단이란 의식주다. 물가와 집세, 공공요금, 각종 세금 날로 올라간다. 국가는 공황구제를 위해 불환지폐를 남발하여 화폐가치가 하락 자동으로 물가는 오른다. 임금에 물가 인상분을 반영되지 않아 실질임금은 삭감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예비군(실업과 반실업)이 넘쳐나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임금만 지급하려 한다. 임금을 적게 주어도 일할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결국, 임금을 어느 정도 받는가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얼마나 완강하게 투쟁하는가에 달려 있다.

최저임금인상투쟁은 대다수 국민에게 해당한다. 또한 최저임금인상액은 공무원 보수, 지자체 임금 결정, 민간기업 임금인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전 민중적 투쟁과제이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이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점이 있다. 과거 전노협이나 초기 민주노총은 매년 표준생계비를 조사하고 산출하여 발표했다. 노동자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생계비 모형이다. 노동조합이 조사에 근거한 임금수준을 제시하는 것이 기본이다. 임투 시기에는 이 자료를 기본으로 하여 단위노조 자체 요구를 만들어 교섭과 투쟁을 해 왔다. 지금은 민주노총이 제시하는 기준은 없고 최저임금, 공무원보수, 지자체 생활임금이 원칙과 기준없이 기존 임금에 얼마를 더 요구할 것인가 수준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조합 주도의 표준생계비를 기준으로 주도적인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도리어 국가가 주도하는 최저임금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정부(기재부)와 자본가단체가 임금수준 결정에 개입한 지 오래되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공익위원이 최종결정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국가권력의 방침에 따를 뿐이다. 공공부문 임금은 기재부가 인건비 예산을 총액인건비제로 꽁꽁 묶어 놓아 임금교섭이 사실상 무의미하다. 결정해 놓은 범위 내에서 윗돌 빼서 아랫돌 끼워 넣는 교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규인력 충원이나 구조조정도 모두 임금예산과 연동되어 있다. 무엇보다 공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는 기재부 횡포로 가장 큰 피해자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도, 임금과 처우의 문제도 모두 기재부의 예산과 연관되어 있다. 범 공공부문 정규직ㆍ비정규직 할 것 없이 정부(기재부)를 상대로 완강한 정치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할 기획이 절박하다.

최저임금법 제1조에는, 최저임금법의 목적에는 생활 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명시하고 있지만, 허울뿐이다. 수십 년을 일해도 최악의 임금체계, ‘최저임금이 최고 임금이 되었다. 최저임금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너무 많다. 특수고용ㆍ플랫폼ㆍ프리랜서 등이다. 최저임금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비혼단신 노동자 중 45%, 임금노동자가 55%. 그만큼 이 사회의 이른바 특고와 플랫폼(온라인 매개) 노동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최저임금에서조차 배제되어 있다. 또한, 특고 노동자 시간당 실수입은 7,289, 가정방문 노동자는 시간당 4,250으로 조사ㆍ환산되었다. 화물연대의 경우, 안전운임제를 둘러싼 투쟁을 전개한 바 있는데, 이것이 곧 화물노동자의 최저임금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저임금 확대적용은 시급한 과제다. 그 알량한 최저임금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12일에 열린 3차 최임위에서 도급제 등 노동자(특고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 논의가 논란 끝에 의제로 확인되었다. 문제는 6월 말까지 이어지는 논의다. 노동자 임금 결정은 노동자의 투쟁력이 변수이다. 최저임금 투쟁은 전 민중적 투쟁력이 응집되어 폭발할 때 최저임금위원회 회의 석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경제]

옐런의 바이든 재선전략 - 무제한 돈풀기

 

신재길

미국은 대선을 석 달 앞두고 주가가 오르면 현직 대통령이 재선될 확률이 83%에 달한다고 한다. 따라서 바이든 정부는 대선을 6개월 앞둔 현재 주가를 올리는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증시뿐만 아니라 11월 대선 직전 실물경제도 호황으로 이끌어야 한다. 미국은 주식을 소유한 가구 비율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해도 50% 정도이다, 미국민의 절반 정도는 증시가 좋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체감을 하지 못한다. 미국 대선 전략에서는 이에 대한 전략도 필요한 것이다.

증시는 올리고 실물경기도 호황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제한 돈 풀기이다. 돈 풀기는 장기적으로 부작용이 심각하게 올 수 있지만, 당장 대선에서는 확실한 승리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바이든과 트럼프의 지지여론은 비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전망이 많다. 이는 6개 경합 주(펜실베이니아 조지아 미시간 애리조나 위스콘신 네바다)에서 바이든이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인단 선거, ()별 승자독식이 미국 대선의 특성상 지지여론보다 한주에서라도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경합 주가 중요한 것인데 이 경합 주들에서 바이든이 열세에 있다. 바이든이 전체 득표에서 우세하더라도 대선에서 질 수도 있는 것이다. 6개 경합 주는 모두 트럼프 우세지역이었다. 그런데 미시간 주가 바이든 우세로 돌아섰다. 미시간 주가 바이든 지지로 돌아선 이유는 바이든 정부가 미시간주에 엄청난 신재생 에너지 산업 보조금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보조금은 유권자들이 바로 혜택을 볼 수 있는 전기요금 감면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트럼프가 되면 보조금 지원이 중단될 수 있어서 미시간주에서 트럼프 지지에서 바이든 지지도 여론이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재정지출을 통해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바이든의 대선 전략은 금리를 안정시켜 증시를 부양하고, 대규모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경합 주에 유리하게 배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략은 상호 모순적이다. 증시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금리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재정지출을 늘린다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것으로 금리를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올려야 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서 미 재무부 장관 옐런의 천재적 꼼수가 나온다. 옐런은 재정지출의 부작용이 6개월 후에 나타나는 간격을 이용하여 재선 6개월 전인 5월부터 재무부 곳간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재무부 일반회계(TGA) 잔고가 4월 말 9,300억 수준에서 5월 말 7,300억 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2,000억 달러를 시중에 푼 것이다. 이게 한화로 270조 원이 넘는 규모이다. 이런 대규모 자금을 한 달 사이에 시중 푼 것이다. 이런 막대한 자금은 유동성을 공급하게 되어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증시를 떠받치게 된다.

두 번째로 529일부터 2개월간 미 국채 바이백’(Buy Back, 조기상환)을 실시하는 것이다. 바이백은 재무부 자신이 발행한 국채를 자신이 다시 사서 소각하는 것이다. 바이백은 의회의 동의 없이 재무부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529일 시작해 7월 말까지 매주 1회씩 총 9회 바이백을 실시한다. 미국의 국채 바이백은 24년 만이다. 미국 정부는 20003월부터 20024월까지 총 675억 달러어치의 국채를 매입한 바 있다. 당시 이례적인 재정 흑자를 기록하면서 여유분의 현금을 활용해 이자 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번 바이백은 연방정부가 적자를 보고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목표 자체가 다르다. 이번 바이백의 취지는 국채 시장에 대한 유동성 공급에 있다. 장기 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다. 실물경기에 영향을 주는 금리는 장기 금리이다. 장기 금리를 낮추어 실질 금리를 낮게 만들면 시중의 자금은 자산시장이나 실물경제에 투자하게 되어 자산 가격을 올리고 경기를 부양하게 된다. 그래서 단기 국채를 발행하여 마련한 돈으로 장기 국채를 사는 바이백을 하는 것이다.

돈 살포의 세 번째는 양적긴축(QT)을 줄이는 것이다. QT는 연준이 보유하고 있는 국채 등의 만기가 도래했을 때 재매입하지 않고 연준의 장부에서 털어내는 방식의 긴축 정책 도구다. 연준의 QT 속도 조절도 채권 유동성을 지원하는 요인이다. 연중은 61일부터 보유 국채 경감 규모를 월 600억 달러에서 250억 달러로 줄이기로 했다. 이는 시중에 매달 350억 달러씩 푸는 효과가 있다.

이런 바이든 재선 돈 풀기 전략에 미 재무부를 필두로 미 연준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까지 합세하고 있다. 미국이 재정적자 상태이기 때문에 재정을 쓰기 위해서는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것도 2008년 금융공황이나 코로나 상황 때만큼 많은 국채를 발해하고 있다. 당연히 국채 수요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중국 등 미국과 갈등 중인 나라들은 보유 중인 미 국채를 팔고 금은을 사 모으고 있는 상태이다. 미 국채 수요의 가장 큰 손이었던 일본마저 자국 통화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미 국채를 팔고 있다. 그런데 자국 재정도 어려운 영국과 프랑스가 미 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이는 바이든 재선을 지원하는 정치적 의도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재선을 위한 이런 전방위적 돈풍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일단 인플레이션율이 그 성공을 좌우할 것이고, 설령 바이든 정부가 대선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해도, 대선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무모한 돈풍기에 화답할 것이다.

 


 

[뉴스해설]

13,808?! 아아~ 자본주의 대한미국

 

진상은(陳祥殷)

2천억이든 3천억이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땅에서 솟았습니까?

그게 다 여러분들 노동자들의 피와 땀입니다.

노동자 여러분들의 피와 땀!

 

30여 년 전 전두환ㆍ노태우의 천문학적 비자금이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시끄러웠을 때,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에 참석한 노동자 대중에게 고 이소선 어머님께서 웅변으로 일깨워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재벌 SK(당시는, 선경)의 총수 최태원과 노태우의 딸 노소영의 이혼소송에서 며칠 전 법원이 최태원은 노소영에게 13,808억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걸 보면서; 우리네 노동자ㆍ인민으로서는 그 돈이 도대체 얼마나 큰 돈인지 도무지 상상도 가지 않는 엄청난 금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근거가, 다름 아닌 30여 년 전에 문제됐던 그 비자금의 일부라는 사실을 보면서, 이소선 어머님의 저 말씀을 떠올리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바에야 누구나, 그 돈들이 정경유착의 산물이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돈들이 과연 최태원, 노소영이 나눠가져도 좋은 돈이냐등등의, 항의성ㆍ비난성 목소리가, 그리고 이번 재판과정에서 노소영이 제출한 그 어머니, 즉 노태우의 처 김옥숙의 메모로 새삼 밝혀진’ 800억인지 900억인지 하는 옛 비자금을 국가가 회수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우선, 과연 저 비자금들’, 그러니까 우리네 노동자ㆍ인민으로선 알기 어려운 무언가 특혜를 바라며, 재벌들을 위시한 ()자본들이 권력자들에게 가져다 바치는 돈들, 즉 자본주의 대한미국의 법률에 의해서도 범죄적인 그 검은 돈들만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재벌 등 대자본의 그것은 물론이요, 불과 수년의 역사만 있는 자본의 것도, 그들의 모든 돈, 모든 재산은 어떤 예외도 없이 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고, 노동자들이 생산, 창조한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필히 되찾아야 할 것들이다.

아니라고? 적어도 그들의 창업 자본, 그 재산은 그들 자신과 그 선조ㆍ가족의 노동의 성과라고? 일단 그렇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그들이 이미 다 먹어치웠고(이것이 방금 불과 수년의 역사만 있는 자본이라고 제한을 가한 이유다), 지금 남아서 계속 커가도 있는, 즉 계속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는 자본은 모두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다. 믿기지 않거든, 예컨대, 자본론1권의 단순재생산의 장()을 읽어보라. 일말의 의문ㆍ이의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입증되어 있으니까!

자본가들도 노동을 한다고? 이것도 일단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결코 무언가를 창조ㆍ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그것도 가능한 한 최대한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노동’,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통해서 필히 박멸해야 할 노동일 뿐이고, 해방된 세상에는 실제로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노동이다!

다음에는, 이번 판결의 근거가 된 수백억 원의 비자금30여 년 전 당시 검찰수사에서는 밝혀지지 않았던, 즉 공정과 상식의 검찰이 밝히지 못했던추가적인 그것이라는 사실!

여기에서 우리는 새삼 물어야 할 것이다. 검찰은 그 비자금사건의 전모를 과연 못 밝힌 것일까? 투쟁하는 노동자ㆍ인민, 비판적 의식이 있는 청년ㆍ학생이 문제가 되면, 고문 등을 통해서 없는 사실들까지 발명해내면서 그들을 징역에 보내고, ‘법살(法殺)’까지 저지르곤 하는 공정과 상식의, 대한미국 검찰인데 말이다. 그들은, 못 밝힌 것이 아니라, 안 밝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하기야, 노동자ㆍ인민의 저항은 고문ㆍ징역ㆍ법살을 통해서라도 억압하고, 대자본과 권력자들의 범죄는 민심을 달랠 만큼만 적당히 처리하는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미국 검찰의 책무이겠지만 말이다.

 



 

[정치]

단결 없이 승리 없다

 

홍승용(현대사상연구소)

 

1.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단결의 확대다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투쟁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민중의 단결이다. 분열은 투쟁의 실패를 예약해 주며, 역으로 투쟁의 실패는 분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는 투쟁의 일시적 승리나 직접적 전과보다 단결의 확대야말로 투쟁의 진정한 성과라고 보았고, 궁극적으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추구했다. 오늘의 제국주의 단계 자본독재하에서도 노동자 국제주의는 해방전쟁의 중심영역에 포함된다.

반면에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고 투쟁 의지를 꺾어버리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을 단결이 아닌 분열과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것은 자본권력이 언제 어디서나 애용하는 전법이다.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통한 의식과 욕구의 전면적 조작, 그리고 매수와 서열화에 따른 분열의 고착화는 자본독재하의 불변조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지난 30여년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극단적 양극화 속에서도 살만하다는 대중적 환각이 단결투쟁의 필요성을 뒷전으로 밀어내 왔다.

 

2. 대안사회 건설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오늘의 전지구적 경제위기는 살만하다는 환각을 극소수만의 특권으로 위축시키고 있다. 매수의 여력도 바닥났다. 자본의 숙명인 생산력의 발전 혹은 불균등발전은 제국주의 전쟁을 일상으로 끌어들여 놓았다. 환경재앙의 상징인 후쿠시마는 자본 헤게모니의 종말양상을 일찍부터 드러내 보였다. 자본독재로는 노동자민중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답이 없으며, 생존을 위해서라도 대안사회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이성적 존재 누구라도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안사회 건설은 자본독재의 연명과 착취의 효율을 위한 개량, 즉 자본독재의 지배비용 감소에 머물 수 없다. 대안사회 건설은 자본의 무한증식본성을 제압하고 공존과 공영을 위한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독자적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자본독재 속에서 의석 몇 개 늘이기 위한 셈법에서 맴돌 수 없다. 독자세력화의 당면 과제는 자본독재와 분명히 선을 긋고,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3. 해방운동 내부의 분열은 치명적이다

그런데 분열은 자본독재의 공작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그에 맞선 해방전쟁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투쟁에 앞장서온 조직이나 정파들 사이에서도, 역사적 경험과 정세판단 혹은 투쟁방법과 추구하는 대안모델 등의 차이로 분열이 고착되어 왔고, 이는 쉽게 극복되지 않고 있다. 그 효과는 실로 치명적이다.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해야 할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고 등을 돌리는 모습에서, 노동자민중이 어떤 희망 혹은 절망을 찾게 될지 물을 수밖에 없다.

정보공유와 이성적 검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파할 자신이 있다면, 무엇보다 대안사회 건설을 절박한 과제로 여긴다면, 그리하여 단결의 확대를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인다면,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운동의 통일을 미리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인식체계를 일부 혹은 대폭 수정하는 노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로써 해방전쟁을 위한 대중적 단결의 불씨를 살려낼 수 있다면, 운동의 통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4. 차이를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하자

단결의 길은 평탄대로가 아니다. 곳곳에 함정과 지뢰가 도사리고 있다. 단결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세상물정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조롱당하거나, 심지어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귀착되라는 의구심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독재를 제압할 노동자국가 건설을 통해 평등사회로 나아간다는 목표를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삼는다면, 의회전술이나 제국주의 혹은 통일전선이나 전위당 문제 등과 관련한 인식 차이들은 치열한 논의를 통해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절대화할 수도 없다. 실패의 경험을 딛고 다시 단결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는 역동적 현실을 따라잡는 불굴의 변증법적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공동의 명확한 목표의식이 단결의 길을 밝혀 주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오늘날 노동자민중이 처한 재난의 절박성 또한 단결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어저면 자본독재에 맞서 해방전쟁에 나선 전우들에 대한 전폭적 존경을 단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단결 없이 승리 없다는 판단은 해방전쟁의 대전제다.

 


 

[노동자논평]

윤석열 정권 퇴진시키고 노동자국가 건설하자

- 윤석열 정권 2주년을 맞이하여

 

이건수

지난 510일로 윤석열 정부 취임 2주년을 맞았다. 윤석열 정권의 지난 2년은 경제위기, 민생위기, 안보위기, 외교위기 등 총체적 난국이었으며, 함량부족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 지난 2년의 국정실패는 20%를 밑도는 윤석열에 대한 지지율 이외에도 4·10 총선에서 참패당하는 것으로 국민적 평가가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윤석열은 국정운영 방향은 옳았지만, 국민 체감이 부족했다는 태도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대중은 윤석열에게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회초리를 들었지만, 윤석열은 반성은커녕 제 갈 길 그대로 가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었던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참패하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지난 총선 103석에서 이번에는 108석으로 오히려 의석을 더 얻으면서 개헌저지선뿐 아니라 윤석열 탄핵저지선도 확보했다. 윤석열이 정권의 위협을 느낄 만한 정치상황도 아니며, 국민을 무서워할 만한 대중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난 일 년 전부터 대중은 윤석열 퇴진, 탄핵 등의 요구를 외치는 등 비등점이 훨씬 지났지만, 민주당 등 야권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윤석열 정권 퇴진을 위한 정치전선을 날카롭게 형성하지 못하고(? 안 하고) 있으며, 투쟁 역시 힘 있게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압승하여 윤석열을 탄핵하자던 민주당의 방식은 애초부터 그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선거용 수사에 불과했다. 진보당은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통해서 의석 세 개를 획득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정의당은 민주당과 진보당 사이에서 어정쩡한 위치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당과 녹색당은 소수파 의제에 매몰되어 한국 사회를 향해서 어떤 정치적 메시지도 던지지 못하고 있다.

87년 이후 민주당의 주도로 민주화가 된 이후, 대한민국은 소수 특권계급이 지배하는 과두제 가짜민주주의 체제가 되었으며, 민주화는 기득권을 대변하는 특권정당 간의 정권교체 또는 세력교체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윤석열 퇴진투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권교체는 가짜민주주의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정권교체에 그칠 것이 아니라 노동자 국가건설로 나아가자. 소수의 지배자, 즉 독점자본가와 특권정치가 결탁하여 근로인민대중 위에 군림하는 가짜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대다수 근로인민대중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나라, 근로인민대중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국가가 필요하다. 윤석열을 퇴진시키고 노동자국가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노동자 민중이 나서야 할 때다.

  

 

[과학칼럼]

과학의 당파성

 

신명호(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정책위원장)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핵심에 바로 이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구분이 있다. 또한 느리게 변하는 것과 빠르게 변하는 것을 나누고 변화의 속도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알아내는 것도 역시 과학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이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과학의 핵심이 아니라, 바로 이 상수와 변수, 속도와 변화율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과 형식은 변해왔지만,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미지의 것들을 다루기 위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루는 개념과 생각들은 변해왔지만, 현실을 다루기 위해 개념과 생각을 창조해 내는 것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죽음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죽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과학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간 역사이며, 변하지 않는 것 속에서 변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느리게 변하는 것과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논문들이 수많은 숫자와 데이터, 사례들로 주장하고 있는 것들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들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일관한다. 죽음과 삶에 관련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과학은 마치 죽음과 삶을 초월한 불멸자처럼 죽음과 삶을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그 자체에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논해보아야 아는 것이 모르는 것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증명하지 못하거나 입증하기 어려운 가설들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서 세계와 자신을 스스로 모델링하게 된다. 학자들은 항상 수많은 변수와 외란이 존재하고 서로가 서로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비선형적이고 복잡한 자연계와 인간사회를 단순화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일반화시켜 버리지만, 사실은 그 주장은 특정한 조건과 환경에서 국소적으로 작동할 뿐 신화보다도 더 못한 것이 되어 오히려 필요한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가치와 권력의 문제가 기본 전제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두고 투쟁과 갈등이 벌어지게 된다.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등 모든 사회과학이 그러한 전장이다. 주류라고 하는 것들은 그들의 주장을 객관적인 결과와 데이터로 입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힘으로 주류를 만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드러눕게 된 행인들은 자기 키가 침대보다 작다고 혹은 크다고 이야기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결국 늘여지거나 절단이 되어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프로크루스테스를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의 힘과 기술을 가진 테세우스와 같은 이가 나타나 그를 해치워야만 그 침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과학은 당파성을 갖는데, 침대가 행인의 키에 비해 짧고 길다는 것을 논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대 밖에 있는 악행의 프로크루스테스를 확인하고 그를 때려잡을 힘과 기술을 갖추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침대와 행인의 길이를 재고 비교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과학은 곧 죽음과 삶을 가르는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침대의 길이나 키를 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프로크루스테스를 때려잡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노동]

민주노조가 지향하는 '민주'의 성격

 

이상배 (공공운수노조 경기본부 조직국장)

민주노총을 가리켜 민노총이라 줄여 쓰거나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정부와 언론이 자주 쓰다 보니 민주노총의 조합원마저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잦다. 이런 경우 엄격하게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민주노총이란 단체의 기본 방침이다. 이유는 민노총이란 단어가 탄생부터 불리는 대상의 비하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문화에 한정하여, 개인의 성만 따서 김씨라고 부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보통은 지위적 우위에 있는 쪽이 격식을 무시하고 상대를 낮춰 부르는 행동으로 본다. 단체나 집단도 마찬가지다. 비록 약칭이라 하여도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름을 임의로 줄이거나 바꿔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함이 일반적이다. ‘민노총은 이렇게 단체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고자 일부러 쓰이는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다, ‘민주노조’, 즉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된 자주성과 민주성을 갖춘 노동조합 집단의 역사와 대표성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민주노총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뿐 아니라, 그것과 궤도를 함께하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는 크고 작은 사건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민주화를 위해 벌어진 다양한 투쟁과, 헤아리기 어려운 희생자의 수가 이 단어에 무게를 더한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있다. 과거부터 이어진 민주화()는 대체 언제 마무리되는가? 투쟁의 결과로 도달할 더 높은 수준의 민주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답을 두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민주노총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성의 확보에 관한 관점도 이와 비슷하다. 쓰는 단어가 같은데, 그것과 얽힌 내용은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수없이 많은 회의에서 민주성을 지키라 요구하지만, 무엇을 기준에 두어야 할지 아리송한 경우가 태반이다.

간단하게 단어부터 다시 확인해 보자. ‘민주주의를 영한사전에서 찾으면 ‘democracy’가 나온다. 반대의 순서로 찾아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점은 원어가 사상의 한 갈래를 뜻하는 ~ism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democratism이란 단어는 멀쩡하게 따로 존재한다. 정치 제도나 사상과 관련한 다른 단어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 republic공화국, 공화제이지 공화주의와 다르다. monarchy군주제군주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렇게 연관을 지으면 democracy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제여야 한다. 통치 형식을 구분하는 제도의 한 종류로 말이다. 이런 간단한 수정으로 그동안 간과했던 고민 지점이 잇따라 나타난다.

언어는 사용자가 속한 사회의 문화와 관점을 포함한다. 그래서 단어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의 본질을 바꿀 수도 있다. 앞서 민주노총민노총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는, 명확하게 이것을 아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제대신 민주주의란 단어가 일반형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란 의심이 생긴다. 하나의 정치 제도가 사상의 한 부류 오해되면 무슨 문제가 일어날까? 바로 객관적이고 완결할 수 있는 과제의 상실, 결과 없는 노력의 반복으로 인한 사회집단이 가진 동력의 낭비, 마지막으로 제도 자체의 그릇된 사용이다.

제도는 목적한 기능의 수행을 위한 하부 구조와 조건이 주어져야 한다. 당연히 충족 여부를 점검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화할 수 있는 기준이 드러난다. 이와 달리 사상은 개념의 집합이다. 논리에 의존하여 주관적인 해석과 주장이 먼저 제시되고, 객관성을 보완할 근거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미래의 일로 넘겨지기 일쑤다. 이런 차이를 이용하여 소수 계급인 자본가가 다수 계급인 노동자를 민주적으로 지배할 길이 열린다.

한국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선 민주제를 앞에 두고 민주주의라 읽는 버릇부터 바꿔보자. 민주제는 집단 의사결정의 성원 범위와 결정 방식을 다투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본을 상대하는 단체교섭과 정부를 상대하는 노정교섭은 노동자를 민주제 정치의 주체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민주노조는 노동조합의 자주적인 운영을 통해 노동자가 민주제를 습득하고, 나아가 전 사회의 운영을 자본가에게서 넘겨받을 수 있도록 역량을 기르는 훈련소이다.

 




[노동정세일지]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 파업출정식 外


편집국

5/28. 부산 국제금융센터에서 공공운수노조 발전HPS지부 파업출정식

정부가 2036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28기를 폐쇄하겠다고 발표, 석탄화력발전소 설비를 점검 정비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인 발전HPS지부는 고용불안의 위기에 처함. 발전HPS지부 노동자들은 공공부문이 책임지고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늘리고 노동자들이 재생에너지 발전소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 일방적인 인사이동 반대한다! 복지수당 인상하라!” 등의 요구안을 발표. 정의로운 산업전환을 통한 일자리 보장 요구를 전면에 건 첫 파업투쟁. 


5.30,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국회 앞 기본권보장 입법 촉구 집회

노조법 2.3,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 초기업 교섭 제도화 3대 입법을 요구. 민주노총은 개원과 동시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노조법 2.3조를 포함한 모든 법안을 재발의해야 한다고 강조. 민주노총은 노조탄압 중단, 사회공공성 강화와 함께 윤석열 정권하에서 심화된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고 평등세상, 노동존중사회실현을 위해 3대 과제의 시급한 입법을 촉구.

 
6/3. 양대노총과 최저임금 운동본부, 국회본관 앞 기자회견

이날 양대노총 조합원 1000여 명은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저지하고, 임금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 최저임금 차별금지법(최저임금법 개정안)에는 최저임금에 대한 차등적용을 명시한 항목을 삭제하고, 최저임금액에 대한 감액적용, 최저임금 적용 제외를 명시한 항목을 삭제한다는 내용. 현행 최저임금법에는 최근 문제가 불거진 '업종별 차별 적용(차등적용)' 뿐 아니라 수습 노동자 감액 적용, 장애인 노동자는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하는 차별적 조항이 존재.

 
6/3. 전국택배노조 우체국본부 간부 결의대회

우정사업본부가 위탁 택배노동자에게 약속한 적정 배달물량을 못 지킨 것과 더해, 새 단체협약에마저 쉬운 해고를 위한 독소조항을 추가한 것이 확인. 전국택배노조 우체국본부가 우정사업본부가 택배노동자에게 노예계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강력히 규탄하는 간부 결의대회, 서울 보신각 앞에서 개최. 우정사업본부가 제시한 새 단협안 초안에는 계약 주체를 이사장에서 지사장으로 변경 배달증 생성 미이행, 역물류, 겸배의무 미이행 시 계약해지 사유 추가 등 사측의 책임은 줄이고 노동자에 대한 감시는 촘촘히 하는내용이 추가. ‘우체국 및 위탁자의 정당한 업무 수행을 방해하는 경우계약을 해지한다는,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조항까지 추가. 


5/29.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 집단해고 원직복직판결 촉구

서울교통공사는 올해 초 노조전임자 36명을 해고. 서울교통공사에서 노동조합 활동은 그간 노사합의로 근로시간면제 관행을 인정해 옴. 그러나 공사는 이런 노사 합의 사항을 어기고 작년 고용노동부의 타임오프 운영현황 조사와 서울시 감사결과를 이유로 서울교통공사 내 두 개 노조의 전임자 36명을 해고. 공사 인사위원회에서 해고자 중 일부에 대해 감경 의결을 하였으나 재해고 처분. 노조는 재해고 처분 배경에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시의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

 

5/28. 민주노총 경기와 경북본부,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 평화적 해결 촉구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와 민주노총 경북본부는 한국옵티칼 노동자 11명에 대한 고용승계와 평택시의 행정대집행 중단, 그리고 평택시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고용승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 평택시청 청사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화적 사태 해결을 촉구. 519일 밤, 경북 구미시 4공단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들이 평택 청북 한국니토옵티칼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 경찰이 농성장 주변에 병력을 배치, 평택시가 계고장을 전달해 행정대집행을 예고. 202210월 한국옵티칼에 화재가 발생해 공장동이 전소되자 회사는 한 달 만에 폐업을 통보. 한국옵티칼 물량을 한국니토옵티칼로 물량 이전. 매출액이 17% 증가. 구미공장 물량의 대체생산을 위해 신규채용까지 했지만, 한국옵티칼 노동자 11명의 고용승계 요구는 철저히 묵살. 


5/23. 공공성-노동권 확대와 국가책임 예산-일자리 쟁취를 요구 집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정부종합청사가 위치한 세종시에서 3천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공공성-노동권 확대와 국가책임 예산-일자리 쟁취를 요구하며 5.23 정부세종청사 포위의 날을 개최. 공공운수노조는 22대 총선이 치러진 지 한 달여가 지났지만 총선 참패 뒤 대통령의 노동조합에 대한 몰이해와 적대적 태도는 여전하고 시장주의 기조 역시 여전하다고 비판. 공공운수노조는 이런 정권의 태도에 항의하고 공공성 노동권 확대로의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하기 위해 정부의 사업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세종시에 모인 것. 


5/21. 민주노총 중앙위원회가 2024년 하반기 투쟁계획을 확정

6모든 노동자 임금인상, 노동권 쟁취 전국노동자대회9윤석열 퇴진 민중대회를 거쳐 11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윤석열정권 퇴진 전국노동자대회로 간다는 계획. 민주노총 2024년 제1차 중앙위원회 강서구 국제청소년센터 유스호스텔 국제회의장. 배정 중앙위원 368명 중 미선출 15명을 제외한 재적인원은 353. 재적인원 과반(177)을 넘긴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가 선언. ‘모두를 위한 임금인상, 노동기본권 쟁취, 사회공공성 강화, 윤석열 정권 퇴진이 하반기 주요 투쟁과제. 민위력적인 광장투쟁과 광범위한 연대전선을 형성하고 여론전·정치전을 강화할 방침.



 

[국제]

사우디, 미국과 맺은 페트로 달러협정 만료선언

 

편집국

지난 9일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간 페트로 달러협정이 공식적으로 만료선언 했다는 소식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이 협정을 갱신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페트로 달러 시대는 50년 만에 (Petrodollar) 막을 내렸다. 페트로 달러 체제는 1971년 미국의 고정환율제 붕괴한 이후, 1975년부터 원유대금을 미국 달러로만 결제하도록 한 시스템이다. 세계 각국에 원유를 판 중동 산유국은 달러를 미 국채와 금융시장 등에 다시 투자하는 이른바 페트로 달러 리사이클링을 구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페트로 달러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고 세계 원유시장을 통제하는 힘을 확보했다.

화폐는 결국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교환의 매개이기 때문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실물 자산과의 연동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실물 자산이 금과 은이다. 세계 대전을 치르며 미국은 대량의 무기 수출과 파괴된 유럽과 아시아 인프라건설 등으로 독보적인 경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각국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미국에 금을 보관하게 되는데,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0%를 보유하게 된다. 미국은 이처럼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금 1온스를 35달러의 금 태환 제도를 만들고 다른 화폐들을 달러에 고정했다. 이것이 브레턴우즈 시스템이고 이로써 달러가 국제 결제통화가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경기부양과 베트남전쟁 등의 이유로 큰 재정적자에 처하면서 달러의 공급을 늘리기로 한다. 그러나 달러의 공급이 보유한 금을 넘어 늘어나면서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 여러 국가는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의 금 보유량은 급격하게 줄게 되면서 1971년에 닉슨 쇼크라고도 불리는 금태환제도의 끝을 선언하게 된다. 달러가 금의 보증을 받지 못하는 달러는 기축통화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새롭게 시도한 통화 시스템이 바로 페트로 달러 시스템이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1974년에 중요한 경제협약을 맺는데,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력을 제공해 주는 대신에, 사우디는 석유 결제를 달러로 한다는 것이다. 달러 표시 석유 결제는 산유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각국은 석유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달러가 필요하고, 달러 수요는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다.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미국은 지속적인 무역적자를 운용해 왔고, 이는 대외순자산의 악화와 미국의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이는 미국 내부에 불평등의 심화와 부채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지배계급 내부에 갈등이 이미 심화되었다. 빈곤의 심화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폭발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미국은 장기 부채 끝에 와 있기 때문에, 공황구제를 위해, 돈을 찍어내면서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달러 수요는 감소하고,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 상승, 금리 상승, 미국 채권 시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강대국들 위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달러, 유로화, 엔화, 위안화 등이 기축통화의 지위를 두고 경쟁하는 다극 체제로 진입했다. 그렇다고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당장 사라지지는 않지만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 주도의 신흥경제국 모임인 브릭스(BIRICS)가 부상하고 있고, 세계 결제통화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 정세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자본주의, 자본의 축적위기는, 다극화된 제국주의 간 경쟁과 대립ㆍ전쟁 확대 양상 치닫고 있다. 핵전쟁을 통한 인류 절멸이냐, 혁명을 통한 역사 발전이냐의 귀로에 선 정세를 체감한다.

 

[국제]

미국 일극에서 다극화 체제로 중국, 러시아 정상회담


전원배

지난 516일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이 정상회담을 가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연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견제를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북··3국 접근 움직임도 도드라진다.

·러 정상은 이날 발표한 중국과 러시아가 양국 수교 75주년에 즈음해 신시대 전면적 전략 협조 동반자 관계를 심화하는 것에 관한 공동성명에서 양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고조시켜 한반도 무력 분쟁과 긴장 고조를 낳을 수 있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한 군사적 위협 행동에 반대한다고 적었다. 지난해 3월 시 주석이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뒤 내놓은 양국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정세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관련 당사국들이 침착하고 자제하며 상황 완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대북) 제재와 압박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실현될 수도 없으며, 대화도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적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해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최근 미국을 포함한 서방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북한과 밀착하고 있는데, 이런 흐름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지난 328일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 이행을 감시하는 유엔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안에 대해 반대해 연장안을 무산시켰다. 당시 중국은 기권했다. 결국 지난달 30일 유엔 전문가 패널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4.5.16. 한겨레에서 인용)

2024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격 침공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나토와 우크라이나 젤렌스키를 내세운 미국의 침공 유도 전략이었다. 즉 바이든은 푸틴을 우크라이나 진흙탕에 처박아 소진 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러시아 경제봉쇄, 나토와 미국 등 서방세계의 군사적 총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의 전쟁 패배는 거의 확정적이다.

장담했던 미국의 러시아 봉쇄는 두 경제대국, 중국과 인도의 비협조로 사실상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이 약점을 하마스가 파고들었다. 하마스의 전격 기습작전에 이스라엘은 혼비백산, 최악의 수를 서슴없이 휘두르고 있다.

바이든은 현란한 이중 플레이를 시전하고 잔악한 이스라엘 네타냐후는 가자지구 인명 살상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분을 상실한 군사작전이고 전투에 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제2의 베트남 전쟁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이로써 1991년 소련 붕괴 후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극화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들

일극체제가 다극화 체제로 변화된 것은 한 걸음 전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일 보 전진임을 깊이 각인하여야만 한다. 일각이지만 미국 중심의 서방은 악이고 중국, 러시아 집단은 선이라는 안이한 정세판단이 부쩍 늘고 있다. 일극이 다극으로 분산된다고 해서 세계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전야에 망가지지 않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증유의 경제 공황이 1870년대 이후 주기적으로 덮쳐오면서 사회는 계급적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자본가 지배계급이 택한 것은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간 전쟁은 내부의 계급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린 것이었다. 이 전쟁놀음에 당시 국제사회주의 당의 결집체인 제2인터내셔널은 지도자격인 독일사회민주당을 필두로 보기 좋게 말려들었다. 지금도 미국을 필두로 한 세계 자본가 지배계급은 전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가공할 핵무기와 효과적인 운반수단은 강대국 간 전면전을 지연시키고 있다.

전쟁의 확산과 인공지능의 생산에 도입함으로써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음으로써 생산 과잉 상태지만 글로벌 불균형은 소비력을 앗아갔다.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를 통한 압력 분산은 한계에 다다르고 세계적 규모의 동시 공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강대국 간의 패권투쟁 중심의 사유를 넘어서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이 불러올 파장에 대비하자. 현재의 지난한 상황이 반복되리라 믿지 말고 급격한 격변에 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자세이다.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적이 언제 오더라도 대비되어 있음을 믿으라.]

- 손자병법 구변편(九變篇) 


  

[노동자의 삶]

노동자는 힘이 세다? (1)


한형식 (교육활동가)

노동자(계급)의 힘은 무엇인가?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정당이 얻은 득표, 사회 전체의 생산에 기여한 노동자의 몫, 노조 가입률, 복지 제도의 가입과 수혜자 수 혹은 혁명적 상황에서 분출되는 노동자 투쟁의 강렬함의 정도 등등. 어떤 하나로 환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 그것도 제도 정치 내에서 치르는 선거에서 자칭 진보 정당이 합법적 조직 노동으로부터 얻는 지지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노동자의 힘이 세진다는 생각이 만연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이건 노동자를 특정 정치 세력이 동원하는 대상으로만 보는 관점에 불과하다. 노동자(계급)의 힘이 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려 한다.

노동자는 위에서 열거한 것들처럼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굳고 잘 다져진 대지 위에 서서 모든 자연적 힘들을 호흡하는 현실적이고 신체를 지닌 인간이 노동자다. 자연의 힘들을 호흡하는 것이 노동자의 힘의 일차적 원천이다. “자연 생산물들이 식료품, 난방, 의복, 주거 등등의 어느 형식으로 나타나든 간에인간이 육체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자연 생산물들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 자연은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과정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만이 아니다. “사회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듯이 사회는 인간에 의해 생산된다. 활동과 향유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실존 방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사회적 활동이며 사회적 향유이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인간에게 있어서 비로소 존재한다.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삼위일체 Weseneinheit (또는 본질 일체성합일이다.‘사회를 또다시 추상으로서 개인에 대립시켜 고정시키는 일을 무엇보다 더 삼가야 한다.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마르크스가 1844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말한 이런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산업 혁명기에 등장한 엄청난 수의 노동자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본가들이 필요로 한 노동자의 수가 몇 명이든, 노동자 남녀가 사랑 때문이든 경제적 계산에서든 낳았던 자녀의 수가 몇이든 간에 노동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가공된 자연의 재료가 있어야 한다. 근육과 뼈와 뇌를 만들 음식과 물과 공기와 햇빛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노동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영국의 자본가들이 곡물법을 폐지했더라도 수입할 곡물이 있어야 했다. 식민지의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수천만의 노예를 갈아 넣은 플랜테이션이 그 역할을 했다. 인도 식민지에서 재배한 싸구려 차에,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들이 재배하고 가공한 설탕을 잔뜩 넣어. 북아프리카의 밀림을 밀어버리고 만든 밀밭에서 대규모로 재배한 밀로 만든 딱딱한 빵을 적셔 먹는 노동자 음식 즉 단시간에 에너지를 공급할 값싼 식재료가 없었다면 산업 혁명도 없었다. 노동자의 몸과 정신에는 단일 작물의 산업적 재배가 초래한 생태적 재앙과 식민주의가 저지른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극이 직접 결부되어 있었다. 이처럼 노동자의 힘은 살아있는 인간인 노동자가 자연 및 사회와 상호 작용한 결과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결과가 노동자의 무력함일 수도 있다.

노동자가 더 많이 창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적게 소비해야만 한다는 것그가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무가치해지고 더욱더 값어치 없게 된다는 것그의 생산물이 더 정형화되면 될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기형화된다는 것, 그의 대상이 더 문명화될수록 그는 더욱더 야만화 된다는 것노동이 더 강력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무력해진다는 것노동이 더 똑똑해질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어리석어지고 자연의 노예로 된다는 것으로.” 즉 소외된 노동이 초래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는 몸, 마음, 경제, 정치 모두에서 힘을 잃어 갔다. 아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노동자가 노동하는 조건과 노동하지 않는 생활의 조건 두 측면에서 노동자의 힘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먼저 노동자의 생활 조건을 특히 대도시에서의 삶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구체적으로는 부동산(주거), 음식, 문화와 여가, 교육과 의료 그리고 돌봄 제도들, 생태적 조건 등을 차례로 공부해야 한다. 엥겔스가 19세기 중엽 영국 산업 대도시를 대상으로 연구하고 제기한 문제들을 되짚으면서 현재의 대도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참조하는 것이 다음 호의 내용이다. 


 

[]

 

깔따구

 

조창익

모내기 끝난

논둑길을 걷는다

깔따구가 길을 막아선다

눈코입 할 것 없이

옷소매 바지 속 가리지

아니하고

온몸을 에워싸며

떼로 덤벼든다

팔을 휘젓고

눈을 감고 코를 막고

귀를 막아도 종횡무진

사방팔방에서 공격하는

깔따구 떼

참으로

괴로운 싸움 상대다

 

다 해도 눈은 감지 마라

잠시

코는 막고 귀는 막아도

눈을 감으면

갈 길을 잃는다

얼굴을 수건으로

뒤집어쓰고

눈을 똑바로 뜨고

몸을 곧추 세워

내 길을 가야한다

그래야 논둑길에서

넘어지지 않는다

 

채널을 돌리지 마라

그 놈이 그 놈이라며

깔따구같은 정치집단들의

환멸과 배신의 정치 앞에

자본독재

기울어진 운동장

거듭되는 농단 앞에서

그 놈들

보기 싫다고

야구로 축구로 골프로

스포츠로

트롯트로 채널을 돌리지 마라

 

똑바로 응시해라

무시로 덮쳐오는 깔따구떼

내 삶을 흔들고

앞길을 막아서도

사시장철 샛푸르른 소나무

대나무 숲길 사이로

싱그런 바람 한 자락

몰고오는

오월의 언덕에 서면

깔따구떼 스멀스멀

달아난다

 

하ㅡ

맞다

노동자들이

바람이다

영육을 빨아먹는

깔따구 떼

노동계급의 입을 한데 모아

투쟁으로

훅 불어버리자

 

해방의 언덕에 서서

다시

내일을 노래하자

혁명을 환호하자

 

 *깔따구

ㅡ각다귀의 전라도 방언

ㅡ남의 것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문화]

노동자문화 그 자체에 대하여 (1)

 

박현욱(노동예술단, 선언)

노동자신문문화면 글을 몇 회째 쓰고 있으니 응당 그 내용은 노동자 문화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정작 노동자 문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룬 적이 없다. 예컨대 노동자 문화란 무엇인가?’ ‘다른 문화와는 어떻게 변별되는가?’ 심지어 그런 것이 존재하긴 하는가?’ 등등. 사실 상당히 논쟁이 될 법한 주제들일뿐더러 지면의 성격상 학술적 쟁점을 심도 있게 논하기엔 부적절하여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 건물을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소 개인적인 생각일지라도 노동자 문화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연재하기보다는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나가려 하니 읽으시는 동지들의 양해를 구한다.

우선 노동자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그런 말 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겠으나, 꽤나 들어온 말일뿐더러 그 존재를 증명하라고 하면 딱히 이거다라고 답하기 어려워들 하는 게 현실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관련한 연구나 논의 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제기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관심 밖(흔히 하는 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2019(이 또한 5년 전이다) 한국의 한 레거시 미디어에 한국 노동자 문화, 대중문화에 포섭 독자성 빈약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리기도 했는데, 박 모 교수의 한국 노동자문화의 성격이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쓴 기사였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566)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썼다는 그 논문을 통해 기사는 다소 충격적이라며 한국에 노동자 문화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태조사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노동자들이 대중문화에 저항하며 독자적 문화를 만들어 내기보다 대중문화와 공모하면서 그 부정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거다.

뭐 좋게 보자면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빈약이라고 답하고 있으니 아예 없지는 않다는 의미로 봐줄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충격적일 만큼 존재 여부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접근 방식이 과학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해서 논문과 이 기사가 말하는 바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어쨌든 수량적 데이터 분석 그 자체는 눈여겨볼 일인데, 그나마. 이 실태조사가 무려 2002년에 이루어진 결과라는 거다. 2002, 신자유주의 광풍에 노동자들은 여전히 짱돌과 화염병으로 맞서며 투쟁하던 때이다. 11월 노동자 대회를 앞두고 수만 명이 거의 밤을 새워 전야제를 할 만큼 지금과는 노동자 문화가 (적어도 양적으로는) 비교조차 안 될 때이니, 그때조차 빈약이라면 지금은 아예 없다라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또한 이 기사는 노동자 문화와 관련하여 그 주요한 요소로 소위 민중가요를 예로 든다. 노동자 문화에 대한 정의를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노동자 문화에서 민중가요를 추상하는 것에 반기를 들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2020민중가요 소환콘서트의 준비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사건은 꽤나 주목할 만하다. 소위 민중가요 판 나는 가수다로 불리며 ‘The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준비되던 이 콘서트와 관련하여 출연자였던 배우 권해효 씨는 한 인터뷰에서 ‘(민중가요가) 용도가 끝났다고 폐기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 . 어쨌든 용도는 끝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폐기를 하지 않는다라면 떠오르는 건 한가지이다. 박물관에 모셔 놓고 가끔 꺼내 추억하자? 아니면 무형문화재 정도로 전승하며 유산으로 삼자? 정도.

아무튼 앞서 말한 기사와 이 콘서트와 관련한 일련의 논란(?)들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활동이 노동자 문화와 관련한 활동이고 내가 창작하는 노래가 민중가요라고 여기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보자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부여잡고 용도가 끝난 일에 용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꽤나 쓸모에 집착하는 편인 내가 당장 필요한 밥그릇이 아닌 고려청자나 빗살무늬 토기를 만드는 헛짓(내 기준에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그런가?

말 나온 김에 민중가요라는 추상을 통해 노동자 문화의 실재성에 대한 구체로 접근해 보자. 내가 만든 노래 중에 이 돈으로 살아봐라는 노래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임금투쟁에 관한 노래다. 집회 현장이나 노동조합 교육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이거 완전 우리 얘기인데 세상에 우리 얘기가 노래로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정말 이 돈으로 못 살겠어요. 우리 조합원들이 꼭 이 노래를 알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동지들이 있다. 아니 꽤 많다.

민중은 계급적 개념이고 노동자계급은 당연히 민중이다.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계급적 독자성을 부정하고 은폐하려 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그럴 수 있는 수단(이데올로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실태조사 결과가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것은, ‘우리 얘기가 노래로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다라던 노동자들의 말에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난 매일 같이 그런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즉 노동자 문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위력적인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노동자 문화에 대한 인식이 빈약으로 나오지 않는 정도라면 아마도 이미 자본주의는 뒤집히고 노동자들의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해서 용도가 끝나긴커녕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 용도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우리 조합원들이 꼭 이 노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 동지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이 꼭 그 노래를 모두 알 수 있을 때까지.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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